[메인서평] 리타 펠스키『근대성의 젠더』

조현준 객원교수

경희대 교양학부
21세기 대한민국에 페미니즘은 여전히 필요한가? 영화 속에는 여전사와 치어리더가, 현실에는 알파걸과 골드미스가 넘쳐난다. 결혼보다는 취업을 우선 순위로 여기는 여대생과 데이트나 섹스는 즐겨도 결혼은 거부하는 콘트라섹슈얼이 용인되는 현 시점에서, 남성들은 대중매체에서 남보원(남성인권보장위원회)을 주창하고, 캠퍼스에서 남학생 휴게실을 요구하며, 사회에서는 군복무 가산점을 복원해달라고 요청하는 이 사회에서 페미니즘은 과연 유효한가?

혹자는 페미니즘이 위기를 맞고 있다고 말한다. 고개 숙인 남성들과 강력해진 여성들 간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남성 해방학이 더 시의적절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21세기 대한민국의 학제 담론을 떠나 조금만 더 시선을 넓히면 그런 환상은 매스컴의 소비 상품일 뿐 현실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명절 끝무렵이면 여성에게 불합리한 결혼 제도에 항의하며 가정법원을 찾는 부부가 많고, 아프간에는 구타를 피해 도망쳤다는 죄목으로 남편에게 합법적으로 귀와 코를 잘리는 어린 아내가 있다.

이런 복합적 양상이 공존하는 현대의 페미니즘은 모든 인간은 신 앞에 평등하다는 천부인권론과 계몽사상을 기반으로 서구에서 발생한 이론적 사조다.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계급이 나뉜다는 전 근대적 사고에 저항하면서 왕이나 귀족 남성만이 아니라 하층 계급과 여성들도 똑같은 인권을 가진다는 근대적 사고에 기반해 형성됐다. 그런데 이런 근대적 사고나 근대성은 이성과 합리성, 객관적 가치와 실증적 과학성에 초점을 두기 때문에 대단히 남성적인 가치로 여겨진 것이 사실이다. 여성해방론의 기틀이 된 것은 근대성이지만, 근대적 주체의 모범적 전형은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집으로 귀향하는 오디세우스나, 그 치명성을 알고도 진리 추구를 멈추지 않는 오이디푸스로 귀결됐다. 이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신화적인 고대의 백인 남성들이다.

현재 미국 버지니아대 영문과 교수인 리타 펠스키가 호주 머독 대학의 교수로 재직 중이던 1995년에 쓴 『근대성의 젠더(The Gender of Mo-dernity)』는 이미 1998년 국내에 『근대성과 페미니즘』으로 번역된 바 있다. 그리고 최근 펠스키의 『페미니즘 이후의 문학(Literature After Fe-minism)』(2003)이 국내에 번역·출간된 것만 봐도 근대성이라는 주제에 대한 국내 여성학계의 뜨거운 관심을 알 수 있다. 『근대성의 젠더』는 12년 전 같은 역자에 의해 번역된 책이 재출간된 특별한 사례이기도 하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딧」(1629년경, 캔버스에 유채,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젠틸레스키는 페미니즘 화가로서 강하고 굵은 선과 뚜렷한 색채로 능동적이고 강인한 여성성을 그려내며 남성 중심 사회에 저항하는 메시지를 그림에 담았다.

『근대성의 젠더』는 기존의 남성 중심적인 모더니즘 이론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근대성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또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 이후 오디세우스 같은 남성 주체의 이성과 합리성, 즉 남성적 가치로 간주돼 온 근대성을 특정 시기 의 서구 문학 작품들을 중심으로 조망하되 여성적 젠더의 관점에서 새롭게 읽는 독창적이고도 재기 넘치는 시도라 할 수 있다. 특히 이 책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영국, 프랑스, 독일의 다양한 문학작품을 통해 근대성이 남성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여성성을 해석하고 여성적 가치를 표현하는 유용한 설명 방식이 될 수 있음을 주장한다.

이 책이 새롭게 주목받으며 재출간된 이유는 개론적이고 도식적으로 추상적 이론을 정리하기보다, 근대성을 여성적 관점에서 보기 위해 텍스트를 구체적으로 분석한 것이 복잡한 미시권력망의 사회에 보다 유효하다고 판단된 까닭으로 보인다. 크게 7부로 돼 있는 이 책은 근대성과 페미니즘, 미분화된 여성성에 대한 향수, 소비의 성애학과 미학에서 오는 쾌락, 남성성의 은폐, 대중문화 속의 대중적 숭고 읽기, 새로움의 정치학으로서의 페미니즘, 성도착의 예술 등을 다룬다. 전반부가 주로 남성이 쓴 텍스트에 대한 분석이라면, 후반부에서는 여성이 쓴 텍스트를 분석하고 있으며 마지막 장에서는 프랑스의 아방가르드 여성 작가 라쉴드를 소개하면서 여성이 어떻게 남근 중심적 성의학과 정신분석학 담론을 전유함과 동시에 그것을 전복시켰는지를 보여준다.

이 책은 여성성과 남성성의 이분법적 가치 대립이 아닌 허구와 비허구, 정전과 비정전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여성의 형상들에 주목한다. 즉 히스테리 환자, 사이보그 인간, 탐욕스런 소비자, 창녀, 여성적 유미주의자, 페미니스트, 성도착자 등을 중심으로 새로운 젠더 정치학의 구성방식을 제시하려 한다. 또한 펠스키의 작업은 19세기에서 20세기로 전환하는 특정한 역사적 상황, 즉 세기말적 현상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 시기의 여성적 근대를 다시 읽어 19세기 문화의 동경, 불만, 불안정을 새롭게 해석하고 근대성의 여성적 면모를 재발견하는 것이다. 이는 근대 서구사회의 우월성에 대한 남성적 신념보다는, 낙원의 과거나 기획된
9백원
미래 혹은 문화적 타자성이라는 여성적 양가성을 조망하려는 시도로 평가받을 만하다. 펠스키는 소비주의나 식민주의 정치학과 관련된 근대에 대한 모호하고도 복잡한 관념, 즉 모순과 모호성으로 가득한 ‘근본적 양가성’(371면)을 근대의 생산적 가능성으로 부각시킨다.

근대의 양가성은 많은 포스트모더니즘이나 문화학, 탈식민주의 관점에 시사점을 줄 수 있다. 근대성은 단단하고 공고한 이성이나 합리성이 아니라 이미 자신 안에 불안정성과 모호성을 자신의 타자로 안고 있다는 관점은 근대-포스트근대가 단절이 아닌 연속성으로 파악되게 하기 때문이다. 가령 근대 이후의 탈식민주의나 반인종주의, 혹은 문화 비평 논의도 이미  어떤 잠정태나 가능성으로 근대 안에 내재하는 것이 된다. 소위 ‘근대성의 대항문화’(374면)는 근대성 내부의 타자성으로 설명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견고한 모든 것은 자취 없이 녹아 사라진다. 단단한 근대는 가변적인 정동의 가치로 재해석된다. 그런 의미에서 생산적 양가성으로서 페미니즘의 유효성을 시사하는 근대의 역사는 여전히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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