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동향] WHO 슈퍼박테리아 확산 경고

일본, 미국 등지에서 항생제 내성 획득한 슈퍼 박테리아 감염 사례 증가
박테리아 유전자 대사 작용 억제하는 슈퍼 항생제 연구 진행 중

인간과 박테리아의 전쟁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지구상의 유일한 패자(覇者)임을 자부하는 인간이 항생제를 내세워 박테리아를 제압한 후에는 항상 내성으로 무장한 패자(敗者)의 반격이 뒤따랐다. 최근 보건 당국을 긴장시키는 ‘슈퍼 박테리아(다제내성균)’로 인해 인간과 박테리아의 전쟁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전세계 확산 공포, 항생제 내성 획득한 ‘슈퍼 박테리아’

지난 8월 세계보건기구(WHO)는 각국에 신종 박테리아에 대비한 감시체제 강화를 촉구했다. ‘뉴델리 메탈로 베타 락타메이즈-1(NDM-1)’라는 유전자를 지닌 이 박테리아는 인도에서 처음 발견된 이래 최근까지 유럽과 일본 등지에서 백 명이 넘는 사망자를 냈다. 한편 미국에서는 매년 9만명 이상이 또다른 신종박테리아인 황색포도상구균(MRSA)에  감염되는데 이 중 2만명에 육박하는 사망자가 발생해 위험성이 심각한 수준이다. 『사이언스』, 『란세』 등의 학회지는 이러한 박테리아의 확산에 대해 경고해왔다. 전 세계의 공포의 대상으로 등극한 이들이 이른바 ‘슈퍼 박테리아’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슈퍼 박테리아는 기존의 박테리아가 항생제에 저항하는 ‘내성’을 획득해 진화한 형태다. ‘슈퍼 박테리아’라는 용어는 1996년 처음 사용됐다. 당시 가장 강력한 항생제였던 ‘반코마이신(vancomycin)’이 남용되면서 ‘반코마이신내성황색포도상구균(VRSA)이 등장했는데 항생제 투약에도 불구하고 감염된 환자가 패혈증을 일으키며 사망하자 충격에 빠진 학계는 이 박테리아에 ‘슈퍼 박테리아’라는 별명을 붙였다.

슈퍼 박테리아가 내성을 획득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대표적으로 항생제가 박테리아 세포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방식이 있다. 세포막의 근처에서 세포 내외를 드나드는 여러 물질의 통로 역할을 하는 다양한 단백질 중 항생제가 이용하는 통로 단백질이 발달하지 않아 내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박테리아가 다른 박테리아로부터 항생제 보호물질을 받아 내성을 갖는 경우도 있다. 『네이처』는 이미 내성을 획득한 대장균에서 분비된 보호물질 ‘인돌(Indole)’이 다른 박테리아를 돕는 사례를 소개하기도 했다. 최근 WHO가 위험성을 경고하는 NDM-1은 효소의 작용이 그 열쇠다. 노정혜 교수(생명과학부)는 “NDM-1은 항생제가 들어오면 이를 분해하는 효소를 만들어내 자연스럽게 내성을 획득한다”고 설명한다. 

그래픽: 한혜영 기자 sweetdreamzz@snu.kr

후항생제 시대의 도래 vs 슈퍼 박테리아 실체는 과장된 것

슈퍼 박테리아 감염 사례가 잇따라 보도되는 일본, 미국 등지와 달리 한국에서는 아직까지 슈퍼 박테리아 감염환자가 보고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이 안전지대라고 안심하기는 이르다.  지난해 한국은 OECD 국가 중 항생제 사용 1위로 항생제 남용의 위험성이 세계적으로 심각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학계는 이미 모든 항생제가 무력화되는 ‘후항생제 시대’의 도래를 예견하는 분위기에 휩싸였다. 정부에서도 올 12월부터 다섯 종의 슈퍼 박테리아를 지정 감염병에 포함시키며 대책 마련에 나섰다.

그러나 슈퍼 박테리아의 실체가 과장됐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질병관리본부 박영훈 주무관(의료관련 감염관리 TF)은 “최근 문제가 된 박테리아는 일부 항생제에 내성을 갖는 것일 뿐 모든 항생제에 내성을 갖는 ‘슈퍼’ 박테리아는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는다”며 과민반응을 경계한다. 박 주무관은 “신종 박테리아가 등장해도 새로운 항생제 개발이 이뤄진다면 이를 억제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했다. 이에 대해  노정혜 교수는 “일반적으로 박테리아가 내성을 획득하는 속도보다 항생제 개발 속도가 느리다”며 “제약 회사가 낮은 이윤을 이유로 개발에 주저하는 현재로서는 슈퍼 박테리아 감염 예방이 최선책”이라고 말했다.  

‘슈퍼 박테리아’ 잡는 ‘슈퍼 항생제’ 개발 연구 진행 중

학계에서는 이미 ‘슈퍼 항생제’ 연구가 진행 중이다. 이상엽 교수(카이스트 생명화학공학과)의 연구팀은 항생제 자체를 강하게 만들기보다 박테리아의 생존에 필수적인 단백질 생산을 막는 방식을 연구 중이다. 연구팀은 아시네토박터균의 유전자 지도를 분석해 대사작용과 직결된 유전자를 뽑고 이들이 만드는 대사산물 중 박테리아의 생체반응에 필수적인 9개를 찾아냈다. 이들을 조절하면 박테리아의 활동을 억제할 가능성이 더욱 높아진다. 이 교수는 “필수 대사산물의 작용을 막는 항생제를 만들면 슈퍼 박테리아도 쉽게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슈퍼 박테리아’의 등장은 미생물에 대한 우위를 확신한 인간이 반격당한 사건이었다. 인간과 박테리아의 끊이지 않는 싸움이 또 어떤 양상으로 접어들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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