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를 뜻하는 프랑스어 ‘Report’에 그 기원을 둔 ‘르포르타주’(reportage)라는 단어는 어떤 사회 현상이나 사건에 대한 단편적인 보도를 넘어 심층적으로 취재·보도하는 것을 말한다. 최근 용산참사를 다룬 만화가 등장하며 알려진 ‘르포르타주 만화’(르포만화) 역시 개인의 삶과 현실의 문제들을 심층 취재해 그림으로 표현하는 르포르타주의 한 장르다. 흔히 ‘만화 같다’는 말은 현실에서 일어나기 힘들다는 의미지만 르포만화의 경우는 현실 그 자체를 생생히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춘다. 르포만화는 현실을 깊숙이 파고드는 필치와 그림을 도구 삼아 다른 어떤 장르의 만화보다 가까이서 삶과 사회를 조망하는 것이다.

그래픽: 유다예 기자 dada@snu.kr

종이 위에 담아낸 삶의 진솔한 장면들

‘작지만 내가 사는 이곳이, 이 터전이 세상의 중심이다’라는 한줄의 글귀가『을지로 순환선』(2008)의 시작을 알린다. 만화가로도 활동하는 최호철 교수(청강문화산업대 만화창작과)는 을지로 순환선을 따라 발이 닿는 이곳저곳을 누비며 사람 사는 모습을 종이 위에 빼곡하게 담아냈다. 차창 너머로 펼쳐지는 산동네와 골목을 다니며 만난 인심 좋게 장독에서 된장을 퍼 주시는 할머니의 모습처럼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 담긴 장면에서는 사람 사는 내음이 풍겨온다. 사람 사는 공간의 생생한 모습들을 모티브로 한 이 작품은 판교택지개발지구, 공사 당시의 청계천 모습 등을 다루며 재개발로 사라진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낸다.

「을지로 순환선」으로 오늘날 삶의 풍경을 엿봤다면 만화가 최규석이 자신의 가족을 직접 취재해 엮어낸 르포만화 「대한민국 원주민」(2008)에서는 옛 가족들의 삶과 정취를 느껴 볼 수 있다. 시골 어귀를 그려낸 작품에선 50년 동안 가족을 위해 늘 아침밥을 지어온 어머니와 학업을 포기하고 어릴 적부터 공장에서 일 해온 누나까지 가난하지만 평범하게 살아온 이들의 삶이 그려진다. 한편 가난한 마을에서 제때 치료받지 못해 죽어가는 아이들과 죽은 자식을 끌어안고 목놓아 우는 부모들의 모습은 이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담담하게 흘러가는 이야기는 6·25와 몇 차례에 걸친 민중항쟁 등 역사적 부침 속에서도 가난하지만 평범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과장도 미화도 없이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다.

자신의 가족을 직접 취재해 자전적 이야기를 풀어낸 「대한민국 원주민」은 가난한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다.

현실을 향해 든 날카로운 펜촉

소소한 일상을 들여다보기 보다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부조리에 주목하는 르포만화의 움직임도 있다. 용산 참사 1주기를 맞아 잊혀가는 재개발 문제를 다시금 제기한 「내가 살던 용산」(2010)은 재개발의 이면에서 자행되는 폭력과 철거민들의 고통을 거친 필체로 그리고 있다. 만화가 김성희, 김수박 등 여섯 명의 작가는 용산참사 사건 현장을 찾아가 취재하고 유가족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사건을 재구성해 냈다. 용산 참사로 희생된 철거민의 삶을 다루고 있는 만화에서는 시공사가 고용한 용역에게 폭행 당한 이상림씨의 이야기가 그려지고 있다. 이상림씨는 용역들의 폭행으로 인해 크게 다쳤지만 오히려 자신들이 다쳤다고 주장하며 자해도 서슴지 않는 용역들로 인해 궁지에 몰린다. 철거예정지역에 거주하는 지역민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일방적 철거를 강행하는 시공사, 이들 못지 않게 철거민을 몰아세우는 경찰 공권력 등은 작가들의 날 선 그림에 의해 그 실체를 낱낱이 드러낸다. 언론에서도 조명하지 않는 희생자들의 애환과 설움을 담아낸 이 만화를 따라가다 보면 집은 물론 희망도 산산이 조각난 희생자 가족들의 안타까운 이야기가 귓가를 맴돈다.

인터넷과 일상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가운데 등장한 인터넷 릴레이 르포만화 「악!법이라고?」(2009)는 더욱 가까운 거리에서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만화는 국가가 국민의 통신 기록을 영장 없이 열람할 수 있는 통신비밀보호법, 거대 언론사가 신문과 방송을 겸업할 수 있게 하는 미디어법 등 현 정부가 내세우는 법안들의 모순을 선명한 그림체들로 짚어낸다. 시위 현장에서 마스크나 복면 등으로 얼굴을 가릴 수 없게 한 복면금지법을 풍자한 만화 초반부에는 지독한 감기에 걸려 마스크를 쓴 한 남자가 등장한다. 집회 중인 곳을 지나다 영문도 모른 채 경찰에 체포되는 그를 통해 복면금지법에 대한 냉소 어린 작가의 시선이 느껴진다. 한편 욕쟁이 할머니가 등장하는 만화의 중반부에서는 할머니가 내뱉는 욕이 거북하기보다는 오히려 정겹게 느껴지는 상황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모욕의 기준이 매우 주관적임을 이야기하며 사이버모욕죄로 이를 어떻게 처벌할 수 있는지 의문을 던진다. 또 인터넷이란 일상적 공간에서의 발화까지도 검열하려는 정부의 정책을 술자리에서도 대통령을 욕할 수 없던 군사 정권 시절의 국가보안법과 비교하며 비판의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용산참사 당시의 참상을 재구성한 「내가 살던 용산」 중 희생자 이상림씨의 일화를 그린 장면.

만화 그 이상의 만화가 되기 위해

불편한 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을 때 대부분 사람들은 오히려 이 진실을 외면하려 한다. 그러나 르포만화는 불편한 진실을 만화라는 가상의 공간에 풀어내어 외면받던 진실과 독자가 좀 더 쉽게 대면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러한 르포만화의 특성을 지닌 작품들은 소수지만 꾸준히 발표되며 그늘에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하지만 일반인들에게 르포만화라는 개념은 여전히 생소하다. 박인하 교수(청강문화산업대 만화창작과)는 “아직까지 르포만화를 그리는 작가들이 많지 않아 발표된 작품 수 자체가 적다”며 르포만화가 활성화되지 못한 현실을 이야기한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박석환 팀장은 “예민한 정치, 사회 이슈를 주요 소재로 다루다가 정치적 압력에 시달릴지 모른다는 부담이 르포만화가 직면한 어려움”이라 말했다.

그러나 한국 르포만화의 미래가 어둡기만 한 것은 아니다. 박석환 팀장은 “르포만화가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지만 만화라는 분야가 예전에 비해 정보성과 지식성을 두루 갖추기 시작했다”며 “전문성과 작가의 자기 고백성이 두드러진 르포만화의 발전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나치 치하 유대인 강제수용소 생존자인 아버지의 사연을 중심으로 만화를 펼쳐낸 아트 슈피겔만의 작품 「쥐」(1972)는 르포만화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1992년에 퓰리처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현실을 사실 위주인 서술이 강점인 르포르타주와 자유로운 상상력을 풀어내는 만화와의 만남. 이 만남이 만들어낼 새로운 르포만화의 세계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