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20를 앞두고 귀빈을 맞이하며
집시법을 강행 개정하려는 실태
국민을 들러리로 세운 정부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생각해야

김빈나 부편집장
다음 달에 귀빈들이 오신단다. 요란한 홍보 탓에 대문 밖까지 벗은 발로 뛰어나가기라도 해야 할 분위기다. 최근 한 정치 드라마 속 ‘격한 대사’의 정체에 대한 의혹이 사실이라면? 시기를 잘 타 적절히 한방 날린 대타(代打)라고 믿고도 싶다.

별 의미 없는 대사를 정치 풍자라고 헛다리짚는 것은 아닌가, 굳이 이 물음에 매달릴 필요가 있을까. 불편하게 돌아가는 정치 판국에 어찌됐든 상당수 시청자의 가슴을 뻥 뚫어주던 명대사니 말이다. 게다가 앞으로 그 수위가 (어느 쪽으로든) 미미하게 달라질지도 모르기에 해당 드라마의 작가 교체는 시청자 입장에서 보면 분명 ‘사건’이다.

물론 PD와의 의견 충돌로 작가가 프로그램 제작에서 하차하는 일은 빈번하다. 게다가 당사자를 제외하곤 누구도 알 수 없는 속사정을 두고, 작가와 제작진이 내놓은 알리바이의 진위를 가리거나 정치적 외압 의혹에 열을 올리는 것은 그다지 생산적인 일 같지 않다. 그보다 작품 하나로 의기투합했던 두사람 사이의 알력 다툼과 수직관계가 눈앞에 그려진다. 감히 ‘들러리’라 부를 수 없는 작가를 유일하게 들러리로 만들 수 있는 PD의 입김 말이다.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하차는 차선책이지 최선책은 되지 못할 성 싶다. 대외적으로 물의를 빚어가며 관계가 파투(破鬪)난 것은 설득-조율-이해로 매끄럽게 이어지는 해결 단계가 실패 혹은 생략됐음을 방증한다. 그리고 ‘대물’드라마의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이 사건은 여느 사건들처럼 어느새 묻혀버릴 것이다.

헌데 절대로 묻혀버려선 안 될, 그리고 결코 쉽게 묻히지 않을 드라마틱한 현실은 아직도 방영 중이다. 한 달 전 강행처리로 밀어붙인 G20경호안전특별법과 1970~1980년대 공안당국을 방불케 하는 종합치안대책은 귀빈들 앞에서 폼만 잡기 위해 세운 대책인 것일까. G20 정상회의 개최 장소의 반경 2~3km내 경호안전구역에서는 주야를 불문하고 집회를 금지한다는 법률도 부족한 모양이다. 야간 옥회 집회 전면 허용 후 약 200회에 걸쳐 야간 집회가 열렸지만 단 한건의 소음 민원도, 폭력 행위도 없었다는데 잠자코 있던 집시법을 난데없이 건드리는 이 상황은 없는 병명을 지어내는 수준이다. 허점은 A라면서 해결책은 B라니, 4대강을 말 그대로 ‘살리면’ 될 일인데 엉뚱한 곳에서 삽을 뜨는 발상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다.

집시법 개정의 근거가 약해지니 특정 단체의 집회 예정일까지 빠삭히 읊으며 ‘집회에 참여할 가능성이 있는’ 불특정 다수를 상식 없는 ‘시위꾼’, 무작정 반정부적인 ‘방해꾼’으로 싸잡는다. ‘왜 하필 G20전에?’, ‘왜 아무 문제없는 집시법을?’에 대한 물음에 이성적으로 답할 수 없으니 결국 예상 가능한 최고의 부정적 시나리오-집회로 인한 G20 개최실패를 근거로 25일까지 집시법 개정안을 무조건 강행처리 하겠단다. 이러한 품위 없는 대응은 이미 오래전 실종된 권위의 빈자리에서 온듯하다. 강행처리에 이용할 국회의장의 직권은 권위가 아닌 권력의 산물이다. ‘스스로 따라오게 만드는’ 권위와 ‘끌고 오는’ 권력은 질적으로 다르다. 유통기한도, 후세의 평가도 다를 것이다. 권위를 지닌 존재라 해도 그 권위가 정당함에 뿌리를 뒀다고 무작정 신뢰하기 어렵거늘, 틈만 나면 권력으로 끝장을 보려는 정부와 여당의 고집불통을 어디까지 이해해줘야 할지 모르겠다.

어차피 PD와 작가는 드라마라는 대의를 위해 만났으니 들러리가 다소곳이 물러난다고 치자. 정부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기에 국민이 항상 들러리가 되길 요구하는 것일까? 존재 이유에 대한 상식을 갖추지 못한 채 권력의 맛에 취한 그대들이 그토록 귀빈들 앞에 선보이고 싶은 것이 ‘품위’라면, 그대들 먼저 에티켓을 준수하길 바란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