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적 실험 돋보였던 ‘미래파’ 등장 이후 낯익은 정치의식을 견지한 사회참여적 작품 등장
‘확장된 정치성’ 바탕으로 현실문제와 더불어 미학적 성취까지 놓지 않으려는 시도

‘도전과 응전의 반복’, 영국의 사학자 토인비가 역사의 전개과정을 설명한 이 말은 한국 문학사를 요약할 때도 그대로 적용될 듯하다. 2000년대 문학작품들이 사회문제에 대한 진지한 천착보다 ‘파격과 전위’를 내세워 화제를 모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최근 2~3년간 역습이라도 하듯 현실참여적 성향으로 무장한 작품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팩션(faction) 문학 등을 위시한 ‘가벼운’ 작품들이 점령한 서점에서 이들을 비집고 자리잡은 ‘묵직한’ 작품들을 사르트르처럼 사회비판적 소설을 높이 평가하는 이들이 본다면 분명 반길 것이다.

그래픽: 한혜영 기자 sweetdreamzz@snu.kr

문학의 ‘턴 어라운드’

정통 서정시인으로 이름난 이영광 시인이 최근 시집 『아픈 천국』을 펴내며 뒤틀린 현실에 일갈했다. 이는 문단의 흐름을 반영하는 상징적 사건이다. 이를 두고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민주화 이후 세대인 젊은 작가들이 촛불 집회 등 새로운 형식의 정치를 경험하면서 이 경험을 1980년대보다 ‘문학적으로 더 세련되면서 정치적으로 표현할 수는 없을까’라고 고민하면서 이러한 흐름이 촉발됐다”고 진단한다. 작품 속에 녹아든 이러한 문제의식은 최근 2~3년새 벌어진 일련의 정치적 사건들에 대한 문인들의 적극적 참여와 맥락을 같이 한다. 실제로 2009년 문학계 10대 뉴스 중 하나로 선정된 ‘작가선언 6.9’는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문인들의 커뮤니티다. 이들은 지난해 용산참사 시국선언에 참여한데 이어 지난 7월 4대강 반대 활동의 일환으로 낙동강을 순례하고, 8월에는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정치성의 귀환은 지난 한국 문단의 지형도를 살펴봤을 때 주목할 만한 ‘사건’이다. 민주화 시절 문단을 풍미했던 ‘참여문학’에 대한 반동으로 민주화 이후의 시대인 1990년대에는 그간 거대담론에 가려진 일상성과 서정성이 시의 중요한 화두로 등장했다. 이들의 뒤를 이어 2000년대 등장한 젊은 시인들은 전위적 내용과 개성적 형식 등 미학적 실험이 가득한 작품들을 잇달아 선보이면서 ‘미래파’라는 이름이 붙었다. 때맞춰 2005년 일본 문학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 문학은 끝났다”는 ‘종언’론을 주장하며 문단에 파문을 일으키자 (『대학신문』 2009년 10월 11일자) 문학의 사회참여적 역할은 그대로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사회비판으로 무장한 작품들의 대열

미래파에 대한 놀라움이 채 가시기 전, 독자들은 정치의식을 견지한 작품들을 최근 다시 발견하게 된다. 이시영 시인은 지난해 「경찰은 그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를 발표했다. 제목만 봐도 창작 배경이 용산 참사라는 것이 자명한 이 작품은 철거민 문제를 다룬 전작 「공사장 끝에」(1986)처럼 저항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장경린 시인이 선보인 연작시 「재개발 지역」에도 비판적 정치의식이 짙게 배어있다.
사회참여적 문학의 귀환은 중견작가들의 소설에서도 이어진다. 김선우 소설가의 『캔들 플라워』와 장정일 소설가의 장편 『구월의 이틀』은 촛불 시위와 고질적인 한국의 좌우 이념 대립 같은 정치적 사안을 정면으로 다룬다. 국가권력이나 이념 대립, 이주노동자나 탈북자 등 사회문제와 그것을 아우르는 ‘거대담론’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소설이 잇달아 나온 것이다.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공지영 작가의 『도가니』도 예외는 아니다. 2005년 광주의 청각장애인학교에서 벌어진 성폭행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은 지배권력의 담합과 부패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들에 뒤질세라 2000년대 이후 등단한 젊은 작가들도 사회비판적 목소리를 냈다. 대표적 인물은 박민규, 김사과, 주원규 작가다. 박민규 작가의 『지구영웅전설』은 형식에 있어서 가벼움을 취할지언정 친미주의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고, 김사과 작가의 『미나』는 입시지옥으로 표상되는 교육 문제를 담고 있다. 한편 지난 7월 출간된 주원규 소설가의 『망루』는 전방위적 비판 의식을 집대성한 ‘문제작’이다. 그가 비판하는 대상은 정치, 경제, 그리고 종교권력의 합체가 지배하는 거대한 ‘제국’으로,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종교 공동체를 모델로 한 ‘대안 교회’를 운영하는 작가의 경험이 작품 곳곳에 녹아들어 있다.

가능한 불가능, 미학과 정치의 결합

얼핏 보기에는 1980년대 ‘참여문학’의 익숙한 그림자를 느끼는 독자들도 많을 테지만 사실 문학의 정치성은 단순히 1980년대로 귀환한 것이 아니라 2000년대 감성에 맞게 새롭게 ‘진화’한 것이다. 과거 작품에서는 계급 갈등이나 사회의 구조적 모순 같은 ‘보이는 정치성’을 다뤘다면 최근에는 이를 다양한 사회문제와 더불어 인간 내부 영역으로까지 확장했기 때문이다. 함돈균 문학평론가는 “문학과 정치를 연결짓는 담론이 새롭게 등장한 배경은 정치 인식의 확장 때문”이라 말한다. 예컨대 정이현 소설가의 『달콤한 나의 도시』나 『압구정 다이어리』 등은 그동안 도시의 젊은 여성의 삶을 가볍고 유쾌하게 다룬 칙릿소설 정도로 알려져왔다. 하지만 함돈균 평론가의 해석에 따르면 이러한 작품은 사실 자본주의 소비코드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넓은 의미의 ‘정치적 소설’이다.

정치성의 귀환을 뒷받침하는 이론적 배경에는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가 자리한다. 2008년부터 그의 저작  『감성의 분할』,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등이 국내에 번역되기 시작했고,진은영 시인은 『창작과 비평』에 기고한 「감각적인 것의 분배」에서 그를 소개해 문단의 반향을 일으켰다. 여기서 랑시에르가 말하는 정치성은 단순히 문학이 현실에 참여해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문학이 기존 사물을 다시 이름 붙여 단어와 사물, 정체성 사이에 ‘틈’을 만들고 여기서 기존 질서에 대한 ‘해방가능성’을 이끌어내는 것”으로 문학의 정치성을 정의한다. 진은영 시인은 랑시에르의 ‘정치성’ 개념에 대해 “문학은 정치행위의 일종이 아니라 새로운 종류의 감성적 분배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정치성을 띤 작품들은 2000년대 유행했던 미학적 실험의 성과도 포기하지 않는 욕심 많은 작품들이다. 1980년대 참여 문학은 사회고발적 성격이 강해 부조리한 사회현장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담아내는 것을 목표로 했다. 최근에는 여기에 덧붙여 현실 문제를 문학적, 미적 성취로 승화시키는 추세다. 이를 두고 김경주 시인은 “과거 문학이 직접적으로 ‘정치를’ 말했다면, 지금 문학은 정치의 미시적인 징후를 드러내며 잊혀진 것을 회유를 하고 미학적으로 승화시킨다”고 설명한다. 즉 젊은 작가들이 정치성 짙은 작품을 쓰는 곳은 실제 현장보다는 미학적 상상에 더 가까운 셈이다.

문단 뜨겁게 달구는 ‘정치성’ 논쟁

문인들은 이 논쟁을 어떻게 바라볼까. 2005년 근대문학의 종언 논쟁 당시 한국 문학의 정치성이 끝나지 않았다는 입장을 표명했던 최원식 교수(인하대 한국어문학과, 전 『창작과비평』 주간)는 “한 시대의 문학이 끝나면 새로운 사회에 맞춰 ‘문학 이후의 문학’이 등장한다”고 말한다. ‘미래파’ 역시 문학의 한 시기가 짓는 ‘표정’에 불과하며 시대가 변하면 언제든 ‘정치성’이라는 문학의 다른 표정이 등장할 수 있다는 것. 한편 문학의 정치성에 반대해온 서동욱 교수(서강대 철학과)는 이에 앞서 『교수신문』 기고문에서 “시는 용도성을 갖지 않고, 정치적 명제를 포함한 주체의 의도는 시의 근본 구성에 속하지 않는다”며 정치성이 진정한 문학의 필수 요소라 주장하는 진영에 대해 우려를 표한 바 있다.

문학의 정치성 이슈는 이제 막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을 뿐이다. 민주화시절부터 시작된 문학의 정치성 논쟁은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