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파를 앞둔 11월의 길목. 옷깃을 여미는 사람들과 달리 새로운 기운을 맞고 있는 곳이 있다. 작년 말 휴관에 들어간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부터 2008년 마니아들의 아쉬움 속에 폐관한 일본영화전용관 ‘명동 씨네콰논(Cine Qua Non)’까지 차갑게 얼어붙었던 독립예술영화관들이 하나 둘씩 활동을 재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5월 독립영화 제작 활동을 지원하는 ‘미디액트’는 상암동에서 재개관했으며 ‘인디스페이스’는 온라인에서 ‘인디스페이스 ON’으로 새 문을 열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새로운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영화관들을 소개한다.

그래픽: 유다예 기자 dada@snu.kr

누벨바그를 선도하는 독립영화관

쏟아지는 블록버스터 영화들 속에 묻혀 제대로 평가 받지 못했던 독립영화들이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홍대에 위치한 KT&G 시네마 상상마당(sangsangmadang.com/cinema)에서는 ‘2010 웃음의 영화관’이란 주제로 잊힐 뻔 한 독립영화들이 11월 한 달 동안 상영된다. 엄마와의 약속을 어긴 벌로 수납장에 처박힌 TV를 꺼내려 애쓰는 형제의 이야기인 「텔레비전의 봉인을 풀어라」, 생활고와 데이트 비용 사이에서 텅 빈 주머니를 쑤시며 고민하는 남자의 해결법을 그린 「88만원」 등 여러 단편 코미디 영화들을 매주 화요일 이곳에서 만날 수 있다.

2002년도에 설립된 대안영상문화발전소 아이공(www.igong.org)은 여성과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의 시각을 담은 대안영상을 만들고 나누는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아네스 바르다, 바바라 해머 등 여성 감독들의 회고전뿐 아니라 국내 유일의 독립다큐멘터리 전문 배급사 ‘시네마 달’과 함께 하는 상영회 ‘달에서 온 다큐’ 등이 열려왔다. 이번 달에는 여성 인권 문제를 다룬 ‘한국의 여성노동자전’이 열린다. YH무역에 대항해 노동자의 생존권을 외친 열사 김경숙과 KTX노조지부장 오미선을 오버랩시킨 「꽃다운 YH 김경숙 30주기 기념다큐」, 노동자인 동시에 엄마이자 아내였던 여자들의 다양한 얼굴을 담은 「얼굴들」은 18일(목)부터 이틀 동안 상영될 예정이다.

시네마테크가 선물하는 아련한 노스탤지어

탈탈탈……. 먼지를 피우며 돌아가는 영사기가 그려내는 아스라한 흑백의 움직임, 시대를 풍미한 엔리오 모리꼬네의 음악과 기억의 뒤안길로 사라진 배우 제임스 딘. 독립예술영화관으로 알려진 시네마테크(Cinematheque)는 본래 프랑스 말로 ‘영화보관소’를 의미한다. 오랜 영화자료를 복원·보관하고 고전영화를 상영하는 각 지역의 시네마테크를 통해 가슴 속에 소중히 담아 둔 명작들을 다시 꺼내보자.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운영하는 시네마테크 KOFA(www.koreafilm.or.kr/cinema)는 한국고전영화를 중심으로 예술영화와 독립영화들을 주로 상영해왔다. 9일(화)부터 14일까지 SF걸작 8편을 특별상영하는 ‘Play Again, 2010 GISF’가 관객에게 SF장르의 역사를 보여준다. 당시에는 천문학적이었던 금액을 들여 만든 프레드 M. 윌콕스의 「금지된 행성」(1956), 뤽 베송 감독의 데뷔작이었던 「마지막 전투」(1983), 할리우드 SF영화의 대명사였던 「백 투더 퓨쳐」(1985) 등 쟁쟁한 작품들이 함께 해 주목할 만하다. 시네마테크 KOFA에서는 상영관 외에도 한국영화박물관, 영상도서관 등이 또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한편 시네마테크 부산(cinema.pif-f.org)에서는 특별기획전 ‘오래된 극장3’가 12월 16일까지 열린다. 이름만 들어도 영화 속 한 장면이 떠오르는 「로미오와 줄리엣」(1968)의 올리비아 핫세, 「마이 페어 레이디」(1964)의 오드리 햅번, 「대부」(1972)의 말론 브란도와 알 파치노를 이 고전영화 기획전에서 만나보자. 시대가 흘러 배우들은 나이를 먹고 유명을 달리했지만 필름에 새겨진 순간은 변하지 않는 감동을 전할 것이다.

각 국의 영화를 즐길 특별한 영화제

독립영화관에는 칸, 베를린국제영화제가 부럽지 않은 축제들이 항시 준비돼있다. 비록 레드 카펫 위의 명사들을 만날 순 없지만 이들의 영화제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웠던 나라들의 독립영화를 만나는 특별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1층에 위치한 하이퍼텍 나다(cafe.naver.com/inada)에서는 매주 화요일 ‘시네 프랑스’가 열린다. 11월, 12월 내내 ‘겨울, 그리고 크리스마스 이야기’라는 주제로 상영되는 영화제에선 추위를 잊게 할 온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 북부에서 대치하던 독일, 프랑스, 영국군이 음악을 주고받다 단 하루의 휴전을 맺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 크리스티앙 카리옹 감독의 「메리 크리스마스」, 25년 전 이혼한 부모의 재결합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세 딸을 담아낸 아르노 데스플레샹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등에서는 프랑스 특유의 다정한 감성들이 묻어난다. 하이퍼텍 나다는 이 외에도 ‘나다는 다큐다’를 통해 다큐멘터리 영화들도 선보이고 있으니 11월의 ‘DMZ 다큐멘터리영화제 앙코르 특별전’ 역시 놓치지 말자.

전국 15개 시네마테크 단체의 연합회인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가 운영하는 서울아트시네마(www.cinematheque.seoul.kr)는 10일부터 28일까지 ‘우리 시대의 아시아 영화 특별전’을 개최한다. 150만 명 이상의 동족을 학살한 캄보디아 좌익단체 크메르 루즈에 대한 기록을 담은 리씨 팡 감독의 「크메르 루즈-피의 기억」, 하수구에서 노는 두 소년의 더럽고 궁핍한 삶을 충격적으로 그린 쉐라드 안소니 산체즈 감독의 「하수구」에서는 여느 대작에서 보기 힘든 삶의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한편 매월 한 번씩 열리는 ‘일본영화걸작 정기 무료상영회’ 역시 이 곳에서 만날 수 있다. 8일 「은밀한 게이샤의 세계」, 12월 13일 「이치죠 사유리의 젖은 욕망」 등 구마시로 다츠미 감독의 핑크 영화들이 준비된 이 상영회에선 색다른 감각의 일본 영화들과 조우할 수 있을 것이다.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은 “샘솟는 돈주머니를 찬 재능 없는 거물보다 끝없이 샘솟는 상상력의 창조적인 개인이 더 좋은 영화를 만든다”고 말한 바 있다. 다시 봄을 맞이하려는 독립영화관에 상상력의 샘이 찰랑인다. 이번 주말에는 규모는 작지만 결코 얕지 않은 영화들을 만나러 독립영화관으로 향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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