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었습니다] 가수 이승환씨

음악을 시작한 지 벌써 21년. 긴 시간 동안 숱하게 무대 위에 서 왔지만 여전히 공연을 앞두면 ‘혹시 공연 당일 아침 맹장염에 걸리진 않을까?’와 같은 애꿎은 생각들로 가슴이 떨려온다는 이가 있다. 바로 지난달 15일 데뷔 21주년을 맞은 가수 이승환이다. 무대에 설 때 만큼은 항상 처음과 같은 떨림을 느낀다는 그는 지난 5월 10집 『드리마이저(Dreamizer)』를 발매하며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강동구에 위치한 그의 음악 공장 ‘드림팩토리’에서 아직도 음악을 꿈꾸고 음악을 갈구하는 그를 만나 봤다.

사진: 드림팩토리 제공

음악을 향한 그의 「단독전쟁」

부모님의 심한 반대로 악기 연주는커녕 음악 감상조차 자유롭지 못했던 그가 음악을 시작한 것은 고등학생 시절 부모님 몰래 락 밴드에 들어가게 되면서부터다. 포크송과 통기타가 유행하던 당시 락이라는 파격적인 장르의 음악을 들고 나온 밴드 ‘들국화’를 보며 가수의 꿈을 키우던 그는 1989년 『B.C 603』을 발매하며 본격적으로 데뷔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연이어 앨범을 히트시키게 된 데에는 발라드의 공이 컸다. 점차 대중적인 발라드 가수로 자리매김해 가던 그는 1995년 4집 『Human』에서 장장 9분 4초에 달하는 락 음악 「너의 나라」를 내놓으며 갑작스레 장르를 전환했다. “락으로의 전환은 사실 하고 싶은 음악으로의 ‘회귀’였다”는 그는 “그때는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음악을 하면 당연히 팬들도 따라올 것이라는 오만 섞인 자부심이 있기도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이 앨범을 계기로 대중적 이미지의 발라드 가수 이승환을 좋아하던 많은 팬들은 그의 곁을 떠났다. 그럼에도 그는 락을 접지 않았고 음반에서 락 음악의 비율을 점차 늘려 갔다. “아마 다음 앨범엔 발라드 음악은 없지 않을까 싶어요. 대중성을 포기하는 건 아니지만 제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니까요”

21년의 세월을 음악 하나에 매달려온 그에겐 음악에 대한 몇 개의 확고한 원칙들이 있다. 우선 노래에는 실제 악기에서 나오는 풍부한 울림만을 담아야 한다는 것이 그 중 하나다. 디지털 장비로 간편하게 제작된 음악이 인스턴트 음식처럼 소비되는 최근에도 그는 해외의 유명 세션맨들과 작업하며 ‘소리’에 대한 자신의 원칙을 고집한다. 최근 발매한 10집에서도 이 원칙을 지키고자 했다는 이승환씨. 그는 “저마저 소리를 외면하면 많은 비용과 노력이 요구되는 악기 연주 작업에 신경 쓰는 이가 아무도 없어질 것 같다”고 말한다.

음악에 대한 그의 또 다른 원칙은 이렇게 완성된 음악을 반드시 정규 앨범에 담아야 한다는 것이다. 타이틀곡으로 내세운 한두 곡의 반응이 좋지 않으면 음반 자체가 사장되는 요즘 시대에 대중에게 앨범 전곡을 듣길 바라는 것은 음악가의 희망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디지털 음원을 낼 수도 있지만 하나의 완성된 앨범을 내는 것이 가수로써의 의무인 것 같다”고 말한다. 그 역시도 정규 앨범 발매에 회의를 느낀 적이 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이내 “이 길이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는 선배 음악인의 길이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며 “‘이제는 정말 마지막 음반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들 때가 있지만 이 원칙을 스스로 깨는 일은 없을 것”이란 강한 소신을 드러낸다.

무대 위, 그만의 『환타스틱(Hwantastic)』

어느덧 열 장의 앨범을 내놓은 그이지만 공연장이 아닌 TV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거의 없다. TV에 자주 출연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그는 “어린 시절 동경하던 들국화는 방송 출연이 아닌 라이브 공연만으로 자신들의 음악 세계를 펼쳐 나갔다”며 “나 역시 그들과 같은 음악 세계를 펼치고자 공연 중심의 활동을 하게 됐다”고 말한다.

“콘서트를 준비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하지만 일단 공연을 시작하면 그때부터 무대는 즐거운 놀이터가 된다”는 이승환씨. 다양한 이벤트와 콘서트 분위기에 맞게 편곡된 음악이 함께 하는 그의 공연은 어느덧 1천회를 넘겼다. 그렇다면 이 많은 콘서트 중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콘서트는 무엇일까. 그는 1990년 7월 25일부터 8월 30일까지 열렸던 ‘한 여름 밤의 꿈’이라는 콘서트를 꼽는다. 20여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날짜조차 잊히지 않는다는 그는 공연 첫 날 같이 공연하는 멤버 수보다도 적은 7명의 관객이 찾아왔던 그때를 회상했다. “한 달이 넘게 공연을 하면서 찾아오는 관객들이 점차 늘어나더니 공연 마지막 날에는 2백여석 전석이 매진되고 공연장 밖에서 음악을 듣는 사람들도 생겼어요. 그때의 벅찬 감동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

20대의 감성을 꿈꾸는『드리마이저(Dreamizer)』

그에 대해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그의 동안 외모 아닐까. “타고난 DNA 덕분”이라 장난스레 말하는 그에 얼굴에서 본래의 나이를 짐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나이가 쉽게 가늠되지 않는 진짜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나 자신만큼은 ‘요즘’ 가수들과 단절적인 기성세대 가수가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그의 음악과 공연, 삶 곳곳에서 여전히 ‘젊은 감성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음악의 미덕이란 “음악인의 권위의식을 버리고 새로운 세대와 호흡할 수 있는 자세”에 있다. “예전부터 ‘왜 선배들은 요즘 나오는 가수들을 모르지’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고 말하는 그는 “외국에서는 연륜을 갖춘 5~60대의 프로듀서들이 아이돌 음악을 제작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이야기 한다. 이어 그는 “한국 역시 이렇게 전 세대가 소통하는 음악 문화가 정착되면 좋을 것”이란 바람을 드러내며 “요즘 나온 걸그룹의 노래 중 세련된 음악이 많은 것 같다”고 웃어 보인다.

그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하는 “20대의 감성”이란 무엇일까. 그는 20대를 “오염되지 않은 순수함과 올곧음을 지켜나갈 수 있는 나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는 “20대라면 자신이 품은 생각을 표현함에 있어 주저함이 없어야 할 것”이라 덧붙이기도 한다. 이미 20대를 지나온 그에게 이런 감성을 지켜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겠냐 질문하자 그는 “옳다고 믿는 것을 그대로 행하며 가사와 삶이 일치하는 음악을 하는 것”이라고 답한다. 최근 용산 참사 공연과 같이 사회 참여적 성향의 공연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그는 스스로가 말하는 젊음을 실천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20대에게 말한다. “20대때만큼은 저항하고 가끔은 객기도 부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언제든 상처는 아물게 될 테니 상처쯤은 두려워하지 말고요. 중요한 건 훗날 자신을 돌아 봤을 때 스스로에게 떳떳해야 한다는 것 아닐까요”

지나온 여정에 대한 이야기가 어느덧 현재에 다다를 때쯤 그는 이내 21년 후에 이루고자 하는 꿈음 이야기 한다. 그는 “음악을 시작하는 누군가의 꿈이 되었으면 좋겠다”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조용하되 침묵하지 않고 부딪히되 흔들리지 않으며 음악가의 길을 계속 걷고 싶어요. 환갑을 훌쩍 넘긴 영국의 락 밴드 ‘롤링스톤즈’ 보컬 믹 재거가 지금까지도 공연을 계속하는 것처럼 21년이 지난 후에도 공연을 계속하고 싶어요. 그래서 몇 년 전부터는 몸 관리도 하고 있습니다. 키도 저랑 비슷한 박재범 정도가 된다면 좋겠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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