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경쟁이 대세인 오늘날
인간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았던
전태일의 ‘깨달음’을 얻어
사회체제를 다시 직시하길

김명환 교수

영어영문학과
오늘의 관악 캠퍼스를 묘사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단어가 ‘경쟁’이다. 아니, 다른 어떤 것보다도 ‘경쟁’이라는 두 글자가 모든 활동의 척도가 되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치열한 경쟁만이 탁월한 성과를 보장한다는 주장이 반박의 여지없이 타당하지는 않다. 구체적으로 어떤 성격의 경쟁이냐에 따라서 생산적일 수도 매우 소모적일 수도 있다.

현재의 관악에서 교수들은 주로 양적인 척도가 강요하는 업적 채우기 내지 부풀리기에 점점 더 휘말리고 있다.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학점과 경력 관리에 매달리면서 개강한지 한 달이 훌쩍 넘은 후에도 좋은 성적의 가능성이 없으면 쉽게 수강을 철회하거나 낮은 학점을 받은 뒤에는 재수강을 하느라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는 일이 잦다. 그러니 관악에서 생활하는 젊은이들 중 상당수가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에서 정말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럼에도 학생들은 (그리고 교수들도) 치열한 무한경쟁이 시대적 대세라고 믿는다. 승자독식의 원리가 판을 치는 양극화된 사회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현실론이 지배하는 것이다. 더불어 상대적으로 뛰어난 능력과 유리한 위치에 대한 자신감 위에서 가난하고 무능한 편으로 몰린 동료 인간들의 실상과 고통에 대해 외면하는 경향이 커져 간다. 그러나 사회적 위계의 사다리에서 미끄러질 위험은 사라지지 않으며 우리의 불안한 마음 밑바닥에 짙게 깔려 온갖 정신적 황폐를 가져온다.    

여기서 우리들은 점점 더 많은 사회 구성원을 무능하고 쓸모없는 존재로 몰아가는 사회체제라면 그 체제 자체가 쓸모없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던져야 마땅하다. 20대의 아름다운 청춘이라면 더욱 이런 패기에 찬 당돌한 물음이 어울리지 않겠는가? 물론 무한경쟁과 사회적 양극화는 한국이라는 특정한 국가에 국한된 것도 아니요, 전지구적인 대세에서 비롯된 거대한 물결로서 쉽게 거꾸러뜨리기 어려운 것이다.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지 40주년이 되는 이번 주에는 『전태일 평전』을 한번 펼쳐볼 일이다. 독자는 불쌍한 사람을 보면 하루 종일 우울해하던 마음 약한 청년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공부를 제대로 해볼 기회는 없었지만 이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애쓰는 과정에서 ‘전태일 사상’이라고 불러 지나치지 않은 ‘깨달음’을 얻은 이를 보게 된다. “누구나 인간이라면 인간의 문제에 대해 외면할 수 없는 인간적 과제를 짊어진다”는 전태일이 남긴 문장은 40년이 지났어도 더욱 빛을 발한다.

대부분의 학생은 『전태일 평전』을 읽고 큰 충격과 감동을 받으면서도 그의 삶이 자신과 거리가 멀다고 느낀다. 이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을 권하고 싶다. 남의 삶을 그린 책을 읽으며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그 삶에 자신을 대입하여 이런저런 궁리를 하게 마련인데, 바로 그렇게 전태일의 ‘깨달음’을 힘닿는 데까지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보면 어떨까. 22살의 꽃다운 나이에 자신을 희생한 한 사람의 생애가 차갑고 딱딱한 역사적 기념물의 낯섦이 아니라 나와 함께 강의실에서 공부하는 따뜻한 체온을 지닌 살아있는 인간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가 얻은 깨달음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점령한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비인간적 이념들을 맑은 눈으로 직시하게 할 것이다. 그것은 ‘쓸모없는’ 인간을 양산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쓸모없는’ 사회체제를 조금씩 허물어가면서 새롭고 인간다운 사회의 싹을 키워나가는 사업의 출발점이 된다. 전태일이 바로 그대와 마찬가지로 막막함과 우울에 시달렸던 그대의 벗이라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마음깊이 깨우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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