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취업 등 인생의 많은 관문들
우리들의 ‘상처’임을 인정하고
‘막장’ 벗어난 뒤에도
그 어려움 잊지 않기를

김정환

사회학과 석사과정
7년 전 이맘때의 기억. 아침에 일어나보니 목이 칼칼하고 콧물이 나는 것이 감기가 분명했다. 불안한 마음으로 서둘러 고사장으로 향했다. 좌석은 왼쪽 창가 맨 뒷자리. 스피커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고 창틀이 뒤틀렸는지 잘 닫히지 않아서 찬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시험까지 어려웠는데, 지문 2개를 읽어보지도 못한 채 ③번으로 기둥을 세운 후 1교시 언어영역을 마쳤다. 쉬는 시간의 화장실은 담배 연기로 자욱했고 욕설이 난무했다. 벌써부터 재수니 삼수니 하는 얘기들이 오갔다. 그렇게 하루 종일 시험을 본 후 지쳐서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오며 봤던 창밖의 도심 풍경은 꽤나 우울했다. 12년의 공교육이 실질적으로 끝났다는 느낌이었지만 후련함이나 보람이 아니라 이런 식의 허무함일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다음날 학교에 간 우리들은 가채점 성적을 적어 제출하고 며칠 앞으로 예정된 기말 고사를 위해 다시 자율학습에 투입됐다.

7년 전 그날, 내가 ③번으로 기둥을 세우게 만들었던 글은 이문구 선생의 『관촌수필』이었다. 대학에 들어오고 나서야 읽은 이 작품은 지금껏 내가 읽은 가장 감명깊은 소설 중 하나로 남아 있다. 돌이켜보면 그처럼 묵직한 작품뿐 아니라 그 어떤 책, 영화, 음악, 혹은 사랑도 그 시절의 기억 속에 있지 않을만큼 나의 10대는 빈약했다. 물론 어디서도 다시 겪지 못할 친구들과의 추억이 많이 있지만, 그 즐거움은 한편으로 척박하고 메마른 환경과의 극단적인 대비 속에서 아름답게 채색된 측면도 강했다. 이 무렵의 기억은 대학에 온 후 거의 잊혀졌다. 동고동락하던 친구들과는 점차 연락이 뜸해졌고, 직접 겪고 느꼈던 한국 교육에 대한 문제의식은 신문지 속 이야기로, 경험에서 멀어져 점점 추상화됐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완전히 탈출한 것이라 생각했던 막장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학점, 군대, 고시, 스펙, 취업 등의 관문이 차례로 나와 내 친구들 앞에 있었고, 앞으로도 결혼, 승진, 주택, 출산, 육아, 교육, 부양 등의 문제가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예감하고 있다. 이렇게 우리는 막장의 매 단계를 그저 묵묵히 혹은 꾸역꾸역 밟아나가는데, 한국에서 이 힘겨운 과정은 과시의 소재가 되거나 존경의 덕목이 되기도 한다. 자신의 고등학교 생활이 얼마나 열악했고, 군생활에는 얼마나 험악하고 비상식적인 일들이 난무했는지, 얼마나 어렵게 취업문을 통과하고 가정과 생활을 꾸려왔는지를 웅변하는 무용담 혹은 후일담을 우리는 종종 들을 수 있지 않는가. 그리고 얼마나 힘겨운 경험을 했느냐에 따라 암묵적인 서열이 생기거나 그에 상응하는 인정을 표하기도 하지 않는가. 이런 의미에서 막장은 훈장이 된다.

하지만 이 훈장은 동시에 상처이기도 하다. 한동안 많은 사람들이 분노해마지 않았던 이름들을 떠올려보자. 김태호, 신재민, 유명환, 타블로, 엠씨몽. 우리에게 막장이 단지 훈장이기만 했다면 입시, 병역, 취업, 부동산 등 훈장 획득의 기회를 포기한 이들에게 그토록 많은 비난이 쏟아졌을까. 막장이라는 훈장을 달지 못한, 아니 그것을 피해버린 이들에게 사람들이 느낀 감정은 자부심이나 긍지가 아니라 박탈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막장의 기억은 훈장이 아니라 상처였다. 그럼에도 한국인들이 애써 간직하고 있는 어려운 시절들의 기억을 훈장이 아니라 상처라고 곧이곧대로 말하기가 쉽지는 않다. 이를테면 나의 아버지가 겪어왔던 그리고 여전히 되뇌며 살고 계신 그 자랑스런 우여곡절들이 상처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잔인하기 때문이다.

내가 입시라는 막장에서 벗어났다 착각하고 그곳의 기억을 거의 잊고 지내던 지난 5년간 학생 자살율이 무려 42%나 증가했다고 한다. 며칠 뒤가 수능인데, 매년 들려오는 비극적인 소식들이 올해에는 없기를 바란다. 또 그 막장을 통과하고 입학할 후배들이 그것을 자신들의 훈장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상처로 여길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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