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터의 자리를 열망하는 가운데
인간의 가치를 등급 매기는 세태
미추의 절대적 기준도 없는데
‘추함’을 매도하는 태도 옳은가

김빈나 부편집장
살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이다. ‘센터’가 되느냐 ‘마녀’가 되느냐. 센터는 ‘병풍’들이 있기에 존재하고, 마녀는 그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이 있기에 마녀로 존재한다.

50여년전 한 때 미국 영화계의 센터였던, 신사가 좋아한 금발의 마를린 먼로의 일생을 보자. 백치미의 대명사 먼로가 남긴 섹스 심벌 중 하나는 빨간 입술과 절묘하게 어울리는 머리 빛깔이었다. 그러나 스타가 되기 전까지 불우한 시절을 보낸 그녀는 원래 갈색 머리의 소유자였다. 먼로가 대중 앞에 완벽한 금발을 유지하기 위해 머리 염색에 매일 공을 바쳤다는 설이 있을 정도니 그녀에게 금발이란 또 다른 정체성이 아니었을까. 에피소드 자체는 조금 과장됐다 해도 우리는 갈색머리의 마를린 먼로를 상상할 수 없다. 먼로가 먼로의 삶을 살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본래의 먼로를 과감히 도려냈기 때문이다. 그 대가로 금발의 먼로는 짧은 여생이나마 스포트라이트를 원 없이 독점했다.

식탁에서 소비되는 쇠고기마냥 사람도 등급이 매겨지는 현실. 상대적인 추(醜)를 도려낸 자리에 미(美)를 덧씌워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누구에게나 참기 어려운 유혹이다. 자아에 상해 입히고 싶지 않은 보편적 인간에게 ‘병풍인생’은 분명 가혹하지 않은가.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다른 현실은 하나에 무섭게 응집하고도 때때로 언제 그랬냐는 듯 무심하게 뿔뿔이 흩어지는 대중 혹은 타자의 요구이다. 모두 매일 같은 취향과 시선을 고수할 수는 없는데, 이 필연적 변덕을 꿋꿋이 견디기에 대다수의 심신은 너무나 미약하다. 영원한 스타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스포트라이트를 좇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지위를 사수하려 치부를 계속 도려내는 것은 자기 정체성을 모조리 포기하지 않는 한  쉽게 행할 수 없다.

나 혹은 사회가, 국가가 미를 덧씌우는 기회비용으로 억지로 도려내는 ‘추함’의 행방에 더는 무관심할 수 없을 것 같다. 미를 추구하고 그것에 찬사를 보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다만 추한 부위를 슥삭 도려내 폐기하거나 원래부터 없던 것인 양 묻어버리는 것은 무조건 현명한 행위일까. 추함은 과연 ‘쓰레기’에 불과한가. 미추의 기준을 누가 정하는 것인지, 그 기준이 영속성을 지니는지를 고려하면 함부로 그러한 결론을 내릴 수 없을듯하다.

여러 상황에 적용할 수 있겠다. 수능이 끝나면 언제 바뀔지 몰라도 ‘지금은 이상적인’ 외적 모델을 찾아 나설 꿈 많은 19세들은 현상의 작은 일부일 뿐이다. ‘슈퍼스타’ 덤에 오르는 게 아니라 가수가 되고 싶었던 이들, 올림픽을 앞둔 선수들에 대한 장난 반, 진담 반의 미추 평가도 마찬가지다. 모두 추함을 혐오해 마지않는다. 덩달아 미에 대한 선망은 방향 없이, 그저 누군가(아마 현재 미를 규정하는 자)에 의해 잠실의 123층 빌딩처럼 계속 솟구칠 것이다. 당분간 130층, 200층 빌딩도 올라가며 서울의 스카이라인을 멋들어지게 장식할 것 같다.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고, 센터가 되고 싶어 몸부림치는 욕망은 그렇게 방향도 없는 동시에 끝이 없기까지 하다.  

100년 후 미추의 기준은 지금과 같을까. 역사가 증명하듯 미추의 절대적 기준은 없다. 현재의 기준에 따라 추함을 버리길 요구하고 요구받는 악순환의 고리를 어디에서 끊어야 하는지는 모르는 와중에, 언제 자리를 뺏길지 몰라 전전긍긍한 센터와 그에 대한 선망에 일생을 소비하는 병풍의 정체성은 모두 훼손되고 있다. 잠재적 병풍인 우리는 대개의 상황에서 못된 마녀에게 스스럼없이 돌을 던져 왔겠지만, 한 번 되물어야 할 것 같다. 정의의 반의어가 아닌 추함에도 생각 없이 돌을 던지고 있지는 않은지.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