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사회 몰락 근본적 책임자는
‘무엇인가’가 되길 포기한 전체 학생
주목 받는 ‘누군가’를 비난하기보다
각자의 권리 행사하는 주체 되길

이소영 취재부장
우리는 한 시대의 위대한 인물과 특이한 사건으로 역사를 기억하는 데 익숙하다. 이와 같은 방법은 끊임없는 시간의 흐름을 하나의 시대로 분절시켜 기억하기에는 사실 꽤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한 시대를 ‘누군가의 시대’로 규정하는 방법은 대표적 인물이나 사건을 유독 강조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사건의 맥락이 간과되거나 상대적으로 평가절하된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사건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요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이야깃거리가 될 만한 단편적 사건이나 신화적 인물만이 강조돼 진실이 가려질 수 있다.


이러한 행태는 현재 서울대의 학생사회에서도 나타나는 듯하다. 최근의 학생사회 몰락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은 ‘황라열’, ‘박진혁’, ‘도청 사건’, ‘선관위의 잘못된 판단’과 같은 몇몇 인물들의 이름이나 특정한 사건이다. 그렇다면 학생사회의 위기는 그 몇 명에게만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들’이 등장하기 전인 1994년 정족수 미달로 전체학생대표자회의가 무산된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하며, 2002년 있었던 총학선거 무산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올해에도 전(前) 총학생회장들의 스캔들만큼이나 관악을 들썩거리게 한 일이 있었다. 올해 초 진행된 두번째 재선거가 그것이었다. 개표 직전 불거진 선거인명부 문제는 학교를 뜨겁게 달궜다. 선거인의 수가 잘못 계산되는 바람에 50%를 간신히 넘었다고 추정됐던 투표율은 49%대로 떨어졌고, 결국 선관위 사퇴, 재결성 등 많은 갈등 끝에 선거는 무산됐다. 이 과정에서 가장 주목받았던 것은 ‘어떤 선본이 선관위에게 이런 욕을 했다더라’, ‘어떤 선관위원이 임의로 투표율을 올리려고 했다더라’하는 흥미성 소재뿐이었다. 학내 최대의 온라인 커뮤니티라는 스누라이프의 게시판은 선관위를, 혹은 재선관위를 욕하는 글로 가득 찼다. 이렇게 해야한다, 저렇게 해야한다는 각종 주장이 판치는 가운데 사건의 본질을 파악한 사람은 없었다.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을 분석해야한다고 주장하던 사람들도 선본의 자질 부족만을 탓할 뿐 50%를 채 넘지 못한 학생들의 투표율에 대해 성찰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움직임은 없었다.

물론 지난 재선거는 파행으로 마무리됐고, 결국 무산됐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파행이 아니다. 학생사회의 대표를 뽑는 자리에서 각 선본들은 그 자질이 어떻든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고, 선관위 역시 어떤 실수를 했든 간에 선거 성사와 절차적 정당성이라는 가치 사이에서 고민하고 결국 원칙을 따르는 길을 택했다. 지난 재선거에서 그들은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는 못했지만 권리와 역할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나는 결코 그들의 잘못된 행동을 변호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뽑을만한 사람이 없어서’ 혹은 ‘귀찮아서’ 투표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당신은 그들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 권리를 포기한 것은,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은 과연 누구인가? 1년간의 총학 부재와 학생사회의 위기는 도대체 누구의 책임인가? ‘학생’사회에서 도대체 그 많던 ‘학생’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프랑스 혁명기의 정치가인 시에예스의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를 변형해 인용하려 한다. 학생사회에서 학생은 무엇인가? 전부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학생사회에서 당신은 무엇이었나?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요구하는가? 무엇인가가 되기를 요구한다.

내일부터 투표가 시작된다. 각자의 권리를 행사해 학생사회의 ‘무엇인가’가 될 수 있는 내가, 그리고 당신이 될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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