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이 코앞에 다가온 지금, 몇몇 신문을 펴면 매우 친숙하게 접할 수 있는 낱말이 있다. 바로 ‘포퓰리즘’이다. 논설위원, 기자, 그리고 외부 필진들이 입을 모아 특정 정당에 대한 지지를 포퓰리즘으로 규정한다.

그런데 포퓰리즘에 대한 맹렬한 공격들이 은근슬쩍 빼먹는 이야기들이 있다. 디테이야(DiTella)의 오래된 정의에 따르면, 포퓰리즘이란 ‘노동계급과 농민의, 또는 어느 일방의 지지를 향유하는 그러나 이 두 부문 중 민중을 ‘대신하여’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관철시키는 정치 행태는, 독자적인 정치력을 갖춘 시민사회가 형성되지 않은 경우에나 힘을 떨칠 수 있다. 이 정의에 따르면, 1980년대 이후 눈부시게 성장한 시민사회가 스스로 정치세력화를 추진하고 있는 지금의 우리나라에서 포퓰리즘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또, ‘포퓰리즘이 나라를 망친’ 사례로 단골 거론되는 아르헨티나의 경우를 보자. 20세기 초반 아르헨티나의 경제가 성장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확고한 산업 자립을 이루지 못한 채 구미로 농축산물을 수출한 결과였다. 페론의 정책은 일부에서 이야기하듯 ‘친 노동자적’이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노동계급에 대한 시혜를 통해 그들의 계급적 자각과 단결을 막는 역할을 했으며, 그 사이 아르헨티나의 지배 계층은 농촌 생산 양식의 근대화와 수입 대체 공업화라는 시대적 과제를 등한시한 채 자기들의 이익 보호에만 급급했다. 더욱이 1950년대 이후 아르헨티나의 주요 수출상품이었던 농축산물에 대해 구미가 보호정책으로 전환한 것도 아르헨티나 경제에 어려움을 더해주었다. 따라서 비록 페론의 임기 동안 아르헨티나가 도약의 기회를 흘려 버린 것은 사실이지만, 페론의 ‘포퓰리즘’ 또는 ‘친노동(?) 정책’이 그 유일한 원인이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아르헨티나 페론의 미망인 이사벨이야말로
독재시절 남편의 향수 되살려 대통령 된 ‘포퓰리스트’

자연대 대학원생으로 전문가도 아닌 내가 이렇게 잘 모르는 이야기를 주워섬기는 것은 사실 좀 민망한 일이다. 그러나 어째서 나도 들어 본 이야기를 ‘일등 신문’의 기자와 유수한 필진들은 모를까? 모르는 것이 아니라면 의도적으로 말하지 않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들이야말로 대중을 선동하는 것 아닌가? 더구나 이들은 더 나쁜 형태의 선동들 하느님 말씀 대신 정치적 선동을 일삼는 대형 교회의 목회자들, 공공연히 쿠데타를 선동하는 대학교수와 ‘중견’ 언론인 등 에는 약속이나 한 듯 침묵을 지킨다. 그러면서 과거 반대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던 집단의 손을 들어 주면서 ‘건전한 반대세력을 육성해야 한다’는, 궤변으로밖에 들리지 않는 구실을 대기도 한다.

1974년 페론이 죽자, 퍼스트레이디이자 부통령이던 이사벨은 대통령직을 승계하여 쿠데타로 실각할 때까지 2년 동안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이사벨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20년 전에 세상을 떠난 후안 페론에 대한 대중의 향수 덕분이었다. 만약, 우리나라에도 독재 정권 시절에 퍼스트레이디 노릇을 하고, 독재자 사후 20 여년이 지난 뒤 그 독재자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여 선거에 이용하려는 정치가가 혹시라도 있다면, (큰 신문들에서 비난하는 쪽이 아니라) 바로 그야말로 진정한 ‘페론주의자’ 또는 ‘포퓰리스트’가 아닐까?

김태호 협동과정 과학사 및 과학철학 전공ㆍ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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