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별 활동을 넘어 사회적 담론으로

해방직후~1950년대(1945~1959)

이 시기는 해방 이후 부일협력자 처벌에 대한 민중의 요구가 높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에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친일파 청산법을 제정했으나 미군정의 거부로 실패하고, 정부 수립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활동이 전개됐으나 역시 실패로 끝났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활동(반민특위): 1948년 대한민국 제헌국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기초특별위원회’를 구성해 ‘반민족행위처벌법’(이하 ‘반민법’)을 통과시키고 반민특위를 구성했다. 모두 22조로 구성된 반민법은 국권피탈에 적극적으로 협력한자, 직ㆍ간접으로 일제에 협력한 자에 대한 처벌을 골자로 제정됐다. 그러나 친일파가 지지기반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의 견제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 후 친일파 척결 주도 의원들을 간첩 혐의로 체포한 ‘국회프락치사건’과 경찰이 특위 산하 특경대를 습격하여 반민특위 폐기 법안을 통과시킨 ‘6ㆍ6경찰의 특위습격사건’으로 반민특위가 와해되면서 친일파 청산 문제는 잠복기를 맞는다.


1960년대~1970년대(1960~1979)

4ㆍ19혁명 이후 자유당 구성원에 대한 부정축재 환수와 공민권 제한 논의 과정에서 그들의 친일 행적이 다시 거론됐지만, 5ㆍ16 쿠데타의 주역인 만주군 장교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친일청산 논의는 다시 수그러들었다. 이후 친일청산 문제는 박정희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민주인사 사이에서만 거론됐다.


▲한일 국교 정상화 회담: 1965년 맺어진 한일 국교 정상화 협정은 ‘대일굴욕외교’로 평가되고 있다.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추진하던 박정희 정부는 자금난을 일본과의 외교관계 수립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당시 협상을 타결했던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은 일제 통치로 인해한국민이 받은 피해 보상에 대해 무상원조 3억 달러, 유상원조 2억 달러, 민간차관 1억 달러를 받는 조건으로 협정을 맺어 한국의 배상청구권을 포기했고 독도 영유권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다. 이에 당시 시민과 학생들은 1964년 6ㆍ3사태를 일으켜 크게 반발했으나 탄압에 의해 수그러들었다.


1980년대(1980~1989)

1980년대에 들어 친일문제에 대한 학술적 연구가 자리잡기 시작했으나 여전히 재야학계의 소수 역사학자 중심으로 논의가 진행됐을 뿐 사회의 주요 담론이 되지 못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 방학진씨는 “1980년대까지는 친일청산 논의의 초점을 흐리는 관제 형식의 사건들이 많았다. 당시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에 대해 정부 주도로 자금을 모아 독립기념관을 설립한 행위는 국민들의 관심을 일본에 대한 감정적 미움으로 돌림으로써 친일청산 문제에 있어서 한국 정부의 책임을 가린 측면이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1990년대(1990~1999)

1990년대는 전문 연구기관의 설립으로 연구가 활성화되고 친일청산 운동이 대중화되기 시작한 시기다. 유일한 친일 문제 연구기관인 ‘민족문제연구소’가 1991년 창립됐고 친일파 인명사전 작업을 장기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또 ‘독도운동본부’가 발족하고 부일협력자의 송덕비나 동상의 철거를 요구하는 등 시민들의 다양한 실천이 있었지만 대부분 일회성으로 그쳐 지속적인 국민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쇠말뚝 제거 및 조선총독부 건물 폭파와 경복궁 재건: 김영삼 정부의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의 일환으로 추진된 사업이다. 쇠말뚝 제거 사업의 경우 풍수설에 입각, 백두대간에 박은 쇠말뚝을 제거하여 화제가 됐다. 또 1996년 찬반의 격렬한 논쟁 끝에 중앙청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용됐던 구 총독부 건물을 폭파하고, 총독부 건물로 훼손된 경복궁이1990년부터 복원 중이다.

▲이화여대 김활란 상 제정무산: 1999년 이화여대에서 김활란 박사 탄생 100주년을 맞아 우월 김활란 상 제정 및 장학 기금을 만들어 사회적 논란이 됐다. 그러나 시민단체와 학생들의 ‘시대 착오적인 친일협력자 기리기’라는 비판에 의해 당시 수상자를 선정하지 못했다.

▲이완용 후손 땅 찾기 소송 승소 사건: 이완용 후손이 이완용이 매국의 대가로 받은 땅의 반환을 요구하는 소송에서 승소, 1997년 이를 돌려받았다. 국가에 대한 개인 재산권의 보호라는 당시 판결에 대해 찬반 논쟁이 일기도 했으며 93년 ‘이완용재산국고환수의원모임’이 결성되기도 했다.

한편 2000년 이후에는, 2002년 국회가 친일파 명단을 발표하고 올해 2월 법제사법위원회에 상정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법안’과 관련된 논란이 불거지는 등 친일청산 운동이 이전의 개별화된 캠페인에서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미치는 총체적 움직임으로 양상이 변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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