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올 때까지
‘그날’이 올 때까지
  • 나영인 기자
  • 승인 2011.03.20 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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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12일부터 서울대 앞 녹두거리의 인문사회과학서점 <그날이 오면>이 홈페이지(www.gnal.co.kr)를 통해 온라인 판매를 시작했다. 성황을 이루던 1996년과 비교해 매출액이 절반도 되지 않는 운영난을 타개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책터 <그날이 오면>은 학생운동의 퇴조, 인터넷 서점의 등장으로  1990년대 중반부터 운영난을 겪기 시작했다. 월세가 넉달이나 밀려 간판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기도 했다. 정상준 강사(경제학과·94, 현 경제학부 강사)는 “일상을 함께 했던 <그날이 오면>이 오늘날 겪고 있는 어려움을 생각하면 안타까울 따름”이라며 지금의 <그날이 오면>을 바라보는 심정을 토로했다.

사실 <그날이 오면>을 포함한 인문사회과학서점들이 겪는 진통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이미 연세대 <오늘의 책>, 성균관대 <풀무질>, 건국대 <인>, 동국대 <녹두>와 같은 많은 대학가 서점들이 문을 닫거나 수험서와 실용서로 명맥만 이어오고 있고 있다. 순수한 학술서적 판매를 고수하는 인문사회과학서점은 <그날이 오면>이 유일하다. 이마저도 장경욱 변호사(전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 사무처장), 이범 교육평론가 등이 주도한 ‘그날이 오면 후원회’의 지원이 있기 때문이다. 할인 혜택에다 사은품도 증정하는 인터넷 서점, 대형서점을 두고 이들이 굳이 십시일반 후원금을 모으는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 10여년간 많은 인문사회과학서점이 문을 닫았지만 <그날이 오면>은 단순히 ‘죽어가고 있는’ 여타 서점과는 다른 특별한 의미를 지닌 공간이다. 1990년대 초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새내기들은 선배들의 손에 이끌려 <그날이 오면>을 찾아와 『전태일 평전』같은 책을 선물 받았다. 호출기나 휴대폰이 널리 보급되지 않았던 때라 서점 앞 게시판에 붙은 메모지를 통해 주변 모임장소를 확인하기도 했다. 약속장소를 잡을 때도 “‘그날’에서 몇 시에 보자”가 통용됐다. 학생들은 김동운·유정희 사장 내외를 ‘그날 형·누나’라 부르며 따랐다. 이처럼 1980,90년대 학번의 학생들에게 <그날이 오면>은 서점이기 이전에 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매체이자, 사람들과 어울려 노는 광장이었다.

 

사진: 하태승 기자 gkxotmd@snu.kr

<그날이 오면>에서 서울대 학생들은 서점 입구에서부터 즐비한 각 분야의 필독서들을 편한 곳에 앉아 읽으며 지적 자양분을 섭취했다. 김병오 교수(국사학과·89, 현 전주대 영상예술학부 교수)는 “지금처럼 그냥 진열돼 있는 책을 사가는 게 아니라 <그날이 오면>에서는 ‘그날 형·누나’들이 선택하고 정리한 책들을 읽고 친구들과 토론할 수 있었다”며 “그 때 얻었던 지혜와 맺었던 관계들이 아직까지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1998년부터 건물 2층에는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들 무렵에야 날개를 편다”라는 이름의 세미나 카페가 자리 잡았다. 당시에는 열띤 토론을 펼치던 학생들로 카페나 서점들이 늘 꽉 차 있었고 “미네르바 카페” 역시 그 중 하나였다. 커피나 머핀을 파는 지금의 ‘카페’와 달리 “미네르바 카페”는 찐 감자, 삶은 계란, 덮밥과 같은 요깃거리를 팔았다. 카페를 설계하고 음식재료를 구입해준 것은 <그날이 오면>을 자주 찾던 학생들이었다.

<그날이 오면>은 종종 저자들을 카페로 초청해 강연회를 열었는데 98년 처음 초청된 이는 바로 홍세화씨였다. 홍세화씨는 저서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자』로 이름은 알려졌지만 ‘남민전 사건’으로 프랑스에서 망명하다가 국내의 민주화 흐름을 타 막 귀국한 상태였다. <그날이 오면>의 김동운 사장은 “국가보안법 때문에 귀국하지 못했던 그를 가까이서 볼 수 있었기에 강연회는 학생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학생들이 주도한 학술지 『그날에서 책읽기』도 같은 해부터 발간되기 시작해 무료로 배포됐다. 『그날에서 책읽기』는 교내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서울대 학생자치도서관’ 등의 학술동아리나 『대학신문』과 연계해 새로운 서적에 대한 정보를 소개하고 각종 세미나 프로그램들을 게재했다. 98년, 99년에 걸쳐 발간됐던 『그날에서 책읽기』를 살펴보면 낯익은 이름들이 자주 등장한다. 『십자군 이야기』의 저자 김태권씨는 「활동가를 위한 남수와 주영의 책장」이라는 만화를 연재했다. 최근 주목받는 젊은 문학평론가 신형철씨도 서평을 기고하곤 했다. 그는 “학술·문화에 대한 관심이 사회 전반적으로 높았던 시절이라 양질의 학술계간지가 많이 발간됐고 『그날에서 책읽기』도 그 중 하나였다”고 말했다. 또 85년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으로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던 비전향장기수 강용주씨의 옥중서신이 『그날에서 책읽기』에 실리기도 했다. 이 서신들이 실린 『그날에서 책읽기』는 총 1200부가 인쇄돼 강용주씨의 구명운동에 기여했다. 

<그날이 오면>은 서울대 학생들에게 놀이터였고 보금자리였으며 책과 지식을 매개로 관계를 맺는 장이었다. <그날이 오면>이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주기를 바라는 “그날이 오면 후원회”는 2006년에 발족해 ‘저자와의 대화’, ‘서평대회’ 등의 행사를 지원하고 있다. 오는 4월 28일에는 『진보집권플랜』의 저자 조국 교수(법학전문대학원)가 강연회를 가진다. 올해로 4회를 맞은 ‘그날이 오면 서평대회’에서는 조흥식 교수(사회복지학과), 고병권 편집장(연구공간 수유+너머), 신형철 문학평론가 등의 심사위원들이 우수작을 선정해 상금을 수여한다.

후원회장인 장경욱 변호사는 “책을 읽고 소통하던 전통이 살아 있는 <그날이 오면>이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기억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날이 오면>이 다시 기지개를 켤 수 있을까. <그날이 오면>과 함께 예전의 왕성한 지식 공동체가 되살아날 ‘그 날’을 손꼽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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