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범석 (생명과학부 박사과정)
나는 Savage Garden의 음악과 샤갈의 그림을 좋아하고 미래에는 좋은 학자, 가장이 되어 행복한 삶을 살고 싶은 대학원생이다. 현재 나의 욕망은 온전히 내 것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을 섞어놓은 듯하다. 많은 이들이 연인이 좋아하는 예술가를 흠모해보거나 부모가 거는 기대에 맞게 살아가려고 노력해 봤을 것이다. 라깡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기 때문이다.

생물학을 공부하는 나는 타인의 욕망을 자신의 것으로 동일시하는 현상을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욕망의 복제로 해석한다. 아마도 인간의 진화에 중요했던 고유한 능력인 모방과 공감 능력 덕분에 욕망의 복제가 가능했을 것 같다. 인간의 문화나 생각을 복제자인 밈으로 간주하고 설명하려는 시도는 이미 리처드 도킨스 등에 의해 이뤄졌다. 유전자와의 유비를 통해 인간 문화의 전파를 설명하는 ‘밈 이론’으로 인간의 욕망을 바라보면 어떨까.

유전자는 복제되고 자연선택을 받는 과정을 반복하여 좋은 유전자는 널리 퍼지고 그렇지 않은 유전자는 사라진다. 인간의 욕망도 비슷한 방식으로 복제되는 것 같다. 부모의, 친구의 나아가 사회의 욕망을 개인이 선택하고 복제하는 과정을 거쳐 매력적인 욕망은 널리 퍼진다. 예를 들어 명문대에 입학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안정된 직장을 구해서 능력 있는 배우자와 결혼하는 것. 어찌 보면 너무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획일적인 욕망일지도 모르지만 밈 이론으로 보면 굉장히 성공한 밈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선택의 문제에 있어서는 유전자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달라보인다. 유전자의 경우 유전자가 존재하는 환경인 자연 그 자체를 선택의 주체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 욕망의 경우 욕망하는 주체가 자신의 욕망을 전적으로 선택하지는 않는다. 이 문제는 주체성의 문제와도 연관이 깊은데,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욕망을 이루며 사는 사람은 주체적인 자아를 가졌다고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욕망의 선택이라는 주제와 관련해 우리 사회에서 크게 두 가지 문제점이 보인다.

첫째로, 어떤 욕망들은 선택을 받기 위해 반칙을 한다. 생물의 유전자 중 전위인자라는 유전자가 존재하는데, 이것은 자기 자신의 DNA서열을 복제해서 다른 곳에 끼워 넣는 ‘복사, 붙여넣기’ 기능만 하고 실제 개체의 번식에 도움을 주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연선택을 받지 않고 증식하는 반칙을 하는 셈이다. 우리의 욕망 중 많은 경우는 자본주의적인 요소와 결합하여 왜곡된 사실을 바탕으로 선택 받는다. 예를 들어 대중매체에 실리는 명품, 신축 아파트, 대부업체 광고를 보면 사실을 왜곡하거나 과장하여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경향이 크다.

둘째로, 욕망의 선택이 유예된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욕망의 선택을 대학 입학이나 취업 후에 하도록 강요받거나 애초에 그것에 관심을 두지 않도록 ‘배려’를 받는다. 사춘기에 응당 시작해야 할 자아 찾기 노력은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 사치인 것 같다. 선택이 유예된 채로 성장할 경우 선택권이 박탈될 수도 있다. 주인 없는 욕망을 이루며 사는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책임을 기성세대나 자본주의에만 물을 수는 없다. 기성세대가 강요한 욕망들도 젊은 세대를 보호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며, 우리 모두가 자본주의의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택하지 못했더라도 욕망을 이루는 주체는 우리 자신이므로 책임은 모두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강요되거나 반칙하는 욕망들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욕망의 주인이 될 수 있는 방법은 있는 것 같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시민의 ‘선택권’은 법으로 보장 되어있다. 그 대상이 비록 욕망은 아니지만 조금씩 사회를 변화시켜나간다면 우리는 점점 더 우리 욕망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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