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6월 24일, 이탈리아의 아나키스트 산타 카세리오는 리옹 거리를 시찰하던 프랑스 대통령 카르노의 복부를 칼로 찔러 암살한다. 1901년 9월 6일, 엠마 골드만의 아나키즘을 추종하던 유대인 레온 촐고즈는 뉴욕 박람회장에서 악수 이벤트를 열던 미국 맥킨리 대통령을 권총으로 암살한다. 이처럼 아나키즘은 어느 순간부터 ‘무질서한 파괴주의’, ‘모든 것을 포기한 허무주의’, ‘무차별적인 테러리즘’, ‘대책 없는 이상주의’와 같은 수식어들이 따라붙으며 부정적 특성이 부각된 단편적인 모습들만 비춰져 왔다. 오해로 얼룩진 아나키스트들의 이야기는 1930년대 이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에 가로막혀 더 이상 들리지 않을 듯 했다. 하지만 최근 아나키스트 네트워크 푸드낫밤스(Food Not Bombs)의 지부는 2년 만에 미국 전역에서 50개가 늘어났고 국내에서도 최근 10년간 아나키즘 관련 서적, 논문 등은 괄목할 만한  양적 증가를 보였다. 특히 지난해에는 아나키스트 우당 이회영의 순국 78주기를 맞아 한국 아나키즘 100년을 회고하는 학술행사도 열렸다. 아나키즘의 물줄기는 왜 끊이지 않고 있을까. 그동안 알지 못했던 대안의 상상력, 무한한 희망의 분출구 아나키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아나키스트 = 질서 파괴자, 혼란 조성자?

‘아나키즘(Anarchism)’은 고대 그리스어 ‘αυ(없는)’와 ‘αρχοζ(지도자)’가 합성된 고대 그리스어 ‘아나르코스(αυαρχοζ)’에서 비롯된 말이다. 호머, 헤로도토스는 ‘아나키(Anarchie)’를 ‘지도자가 없는, 키잡이가 없는 선원’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했다. 민주주의를 무질서하다고 생각했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민주주의를 비판할 용어로 ‘아나키’를 사용했다. 이후 아나키즘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이들의 해석을 바탕으로 이뤄졌다. 동북아시아에서는 1902년 게무야마 센타로가 『근세 무정부주의』에서 처음 ‘무정부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후,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로 번역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파괴의 열정은 곧 창조의 열정이기도 하다”며 권위에의 저항과 ‘파괴의 행동’을 강조했던 바쿠닌을 보면 아나키즘은 확실히 무질서를 선호하는 사상같다. 하지만 아나키즘은 무질서, 혼돈, 혼란을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니다. 아나키즘은 강압적인 국가 권력 및 사회적 권력을 부정해 개인의 절대적 자유가 행해지는 사회를 실현하려는 사상이다. ‘아나키즘의 아버지’ 프루동은 부정적으로 해석됐던 ‘아나키’를 혼란과 전혀 반대의 뜻으로 사용한다. 혼란을 조장하는 권위적인 통치 기구가 없을 때 자연스러운 질서와 조화가 회복된다는 자신의 주장을 역설적으로 ‘아나키즘’이라고 표방한 것이다. 저작 『소유란 무엇인가?』에 나타난 그의 사상은 아나키즘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흔히 마르크스는 아나키즘이 유토피아주의이며 테러로 혼란만 조장한다며 비판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의 저작들을 면밀히 검토해보면 그가 아나키즘의 긍정적 요소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마르크시즘은 프롤레타리아가 국가를 장악한 이후에 자본제 경제를 폐기하고자 했다. 하지만 정작 마르크스는 이러한 ‘국가사회주의’를 부정하고 아나키즘이 추구하는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자의 어소시에션’에 동의한다. ‘어소시에이션’은 ‘에고이스트’만이 형성할 수 있다.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 슈티르너가 말하는 ‘에고이스트’, 즉 ‘유일자’란 이익과 욕망에 홀려(possessed) 있지 않은 자유로운 ‘자기소유자’를 뜻한다. ‘자기소유자’는 가족, 민족, 국가 등의 사회적 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가 아닌 아무런 내용을 ‘소유’하지 않는 ‘무(無)’로서의 실존적 존재이다. 다시 말해 ‘어소시에이션’은 가족, 공동체, 민족, 국가, 사회와 같이 헤겔 관념론에서 말하는 ‘일반자’에 의해서가 아닌 눈앞에 보이는 있는 그대로의 자유로운 인간들의 결사체인 것이다. 실체적인 중심을 전제하는 국가집권주의와 달리 “아나키즘은 그러한 동일적 실체를 부정하는 흄이 말하는 어소시에이션(관념 연합)에 비견”될 수 있는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 『트랜스크리틱』) 한국아나키즘학회장 김성국 교수(부산대 사회학과) 역시 “아나키즘은 ‘위로부터의 지배’를 부정하고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질서’를 추구한다”고 말한다.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자의 어소시에이션’,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질서’는 아나키즘이 무질서를 조장하고 무조건 모든 조직체를 부정한 사상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준다.

상호부조의 질서와 대등한 개인들의 망상(網狀)조직

그렇다면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 협동적 공동체는 무엇을 기반으로 성립되는가.

아나코-코뮤니스트(Anarcho-Communist)이자 아나키즘을 보다 과학적인 이론으로 발돋움 시킨 크로포트킨은 ‘상호부조론(Mutual-Aid)’을 주창하며 아나키즘 공동체에 대한 이론적 배경을 제공한다. 지리학자이기도 한 크로포트킨은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인정하지만 생존경쟁의 최대 무기는 적자생존이 아닌 상호부조이며, 이 보이지 않는 법에 의해 사람들은 저절로 협력해 사회를 형성해나간다고 주장한다. 크로포트킨은 자신의 저서 『상호부조론』에서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군집을 통한 상호의존을 증명한다. 크로포트킨은 배고픈 동료가 요청할 경우 자신이 먹은 음식을 게워 내주는 개미, 먹이를 발견할 경우 신호를 보내 함께 사냥하고 망을 보는 흰꼬리독수리, 제비갈매기, 물범, 고래, 북극여우 등의 수많은 사례에서 발견되는 동물세계의 상호의존을 포착한다. 이어 그는 자연선택에서 더 잘 살아남게 해주는 개체들의 연대성과 사회성은 고등 동물일수록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며 인간 사회의 사례들도 분석한다. 일례로 에스키모들은 부족의 단합이 깨지지 않도록 “어떤 사람이 부자가 되면 씨족사람들을 성대한 잔치에 불러 모아 실컷 먹인 다음에 전 재산을 모두에게 나눠”주는 ‘포틀래치’를 수행하는데 ­­이는 아프리카의 부시맨, 호텐토트족의 사례들과 함께 원시사회의 상호부조를 설명해준다.

크로포트킨은 진화의 원칙인 상호부조론에 따라 민중들이 혁명 이후 자연스레 지배자를 내몰고 ‘코뮨’을 건설할 것이라고 본다. 코뮨이란 “각자의 자주적 역량과 이웃사람의 연대에 의거”해 모든 생산수단이 공유되고 각자의 필요에 따라 부(富)가 자유롭게 분배되는 “협동조합의 망상(網狀)조직”이다. 

이것은 낭만적 몽상이 아니다

아나키즘이 추구하는 자주공동체는 그 성립과정과 형태가 낭만적이고 목가적으로 보일 수 있다. 대중들이 자발적, 자율적으로 협동해 전제적 국가를 대체할 혁명을 일으킬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나키스트를 ‘몽상가’라고 비판하는 이들은 아나키즘이 지나치게 인간의 반란적 본성을 믿는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아나키즘은 단순한 낭만적 몽상이 아니다. 실제로 아나키즘적 자주공동체에 해당하는 사례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박홍규 교수(영남대 법학과)에 따르면 “비록 특정 지역에 한정돼, 연대의 형태가 아니긴 하지만 스페인 몬드라곤 협동조합은 성공적인 아나키즘 자치공동체”이다. 몬드라곤 협동조합은 인간적이면서 효율적인 경제체제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몬드라곤 협동조합에서는 종업원이 출자해 조합원이 되므로 노동자가 곧 소유자가 돼 전원이 직접 기업 경영에 참가하고 관리한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고용·피고용, 노사관계가 없으며 해고를 하지 않는 방침이 있다. 이윤의 분배에 있어서도 잉여금의 70%는 조합원에게 돌아가되 배분된 이윤은 강제저축 된다. 이처럼 몬드라곤 협동조합은 자유가입, 민주적 조직, 노동주권, 자본의 종속성·수단성, 관리에의 참가, 조합간의 협동 등의 기본원칙을 가지고 있다. 회사 사정이 어려워져 어쩔 수 없이 임시 휴직 상태가 되더라도 조합원들은 기존 월급의 80%를 지원받고 보통 1년 이내로 다른 곳으로 자리를 배정 받게 된다. 상호연대, 상호부조에 입각해 조합원들은 서로 고통을 분담하고, 기업들은 사정이 어려운 다른 기업을 돕는 형식으로 상생(相生)한다. 몬드라곤의 유통그룹 ‘에로스키’에서는 비정규직이 전체 조합원 수의 15%를 넘지 않으며,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임금 차이가 없다. 또 조합원 간의 임금 차이도 최고임금이 최저임금의 10배 미만으로 제한된다. 몬드라곤 협동조합 속에서 조합원들은 협동조합과의 일체감, 노동의 즐거움, 동료와의 친밀감을 느낀다.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조직과 제도들이 인간을 소외시켜가는 오늘날, 아나키즘은 분명히 유의미한 사상으로서 제 역할을 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박홍규 교수는 “아나키즘이 반드시 옳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자본주의 일변도로 나아가는 현대사회의 국가중심적, 경제중심적, 자연파괴적인 상황에 대한 반성적, 성찰적인 의미를 가져다줄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종종 숨 막히는 현실 속에서 마음 한 구석 자유를 향한 외침을 잊고 지낸다. “지상에 단 한사람이라도 자유롭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나는 자유롭지 않다”는 바쿠닌의 말처럼 그 외침이 크게 울려 퍼질 때까지 아나키즘의 질주는 계속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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