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식민지 통치 시기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진영과는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줬던  아나키스트들. 독자적인 노선에 따라 활발하게 활동하던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은 1930년대 이후로 국내에서 그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1920~1930년 사이, 자유를 부르짖던 한국 아나키스트들의 자취를 따라가 보자.

소위 ‘문화통치’ 시기였던 1920년대, 공산주의와 아나키즘은 크게 구별되지 않은 상태로 빠르게 수용 및 확산되기 시작했다. 공산주의자들과 혼재돼 활동하던 국내 아나키스트들은 곧 공산주의자들과 대별되는 독자 노선을 펼쳐나간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호룡 책임연구원은 “1920년대 초반부터 아나키즘과 공산주의는 분화되기 시작해 각자 독자적인 주장과 활동들을 전개했다”고 말한다.

점진적인 개혁에 반대하고 대중의 반란적 본능을 믿었던 아나키스트들은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에 입각한 의열단을 결성해 조선총독부 청사에 폭탄을 투척하거나 일본 육군대장 암살을 시도한다. 아나키즘의 ‘직접행동’과 ‘행동에 의한 선전’ 개념은 식민지 상황에서 테러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하지만 아나키스트들은 공산주의 진영에 대한 비판을 겸한 보다 이론적이고 조직적인 활동들도 전개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문학에서 벌어진 ‘아나-볼’ 논쟁이다. 1925년 공산주의 계열의 문인들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을 결성해 ‘계급운동으로서의 문학’을 강조하며 문단을 장악하기 시작한다. 박영희가 문예작품의 형식보다 계급문학으로서의 내용과 특정 주제의식을 강조하자 김화산, 이향, 권구형 등의 아나키즘 계열 문인들은 즉각 반박한다. 이에 임화 등의 카프 지도부는 “대중에게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고자 하는 예술파적 소시민”이라며 카프에서 아나키즘 계열 문인들을 모두 제거한다. 이후 카프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노선을 견고히 하고 아나키즘적 색채를 지웠지만, 김화산 등이 문학의 공간 안에 유일자의 독특성과 자율성을 보존하고자 시도했던 점은 우리 문학사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만하다.

문학에서의 논쟁은 전체 아나키스트와 공산주의자 간의 대립으로 이어졌고 이후 아나키즘은 제3의 사상으로서 조직적인 사회운동을 전개한다. 1927년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 간의 연합 단체인 신간회가 결성되자 아나키스트들은 강도높은 비판을 가한다. 일반적으로 신간회는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 세력이 힘을 모아 독립을 꾀한 단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왔다. 하지만 아나키스트들은 사회진화론에 따른 계급적 불평등을 인정하고 지배권력을 욕망하는 민족주의 세력을 인정할 수 없었다. 더불어 중앙집중화된 볼셰비키 정권을 추구하는 공산주의 세력 또한 진정한 해방을 이끌어낼 수 없다고 비판했다. 

1927년 12월 23일 신간회 평양지부를 결성할 목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이 준비 작업을 하자 아나키스트들은 신간회에 맞서고자 12월 22일 관서흑우회 창립대회를 개최한다. 관서흑우회는 아나키스트 잡지 「흑색전선」을 소개하고, 평양양화직공조합 등의 노동조합을 조직하는 한편, 신간회에 대해서도 강도 높은 비판을 가한다. 이들은 공산주의 진영을 “적색 개량주의”라고 부르고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간의 권력 다툼의 제물이 되는 민중을 “부처님 앞 고기”로 표현하는 풍자만화를 그리기도 했다. 1929년에는 자꾸만 커져가는 볼셰비키 진영을 경계하기 위해 전국적인 단일조직으로서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한다.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은 “현재의 국가제도를 폐지하고 코뮌을 기초로한 자유연합적 사회제도를 건설”, “사유재산제도를 폐지”, “전 인류의 자유, 평등, 우애의 사회를 건설”하자는 결의문에서 보듯이 순수 아나키즘적 경향을 지향하며 학생들에게 아나키즘 교육을 시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1931년 일제경찰에 의해 조선무정부주의자동맹에 대한 검거가 시작되자 아나키스트 운동은 급속도로 쇠퇴하게 된다.

독립운동 시기의 국내 아나키즘 운동은 일제의 탄압과 함께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진영의 견제를 받는 등의 어려움을 겪으며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에는 그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하지만 아나키즘은 독립운동의 한축을 담당했으며­ 자유를 위한 투쟁이 또 다른 권력을 생산하는 사회운동의 모순에 대한 충실한 견제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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