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향은 대구다. 80년대 정계 실력자들이 대거 배출되었던 모교 운동장 한켠에는 동문인 전직대통령의 나무가 자리잡고 있다. 어린 나에게 ‘전통’은 물가를 잘 잡은 대통령이었고 저쪽 동네의 ‘몰표’를 보며 우리도 분발해야 한다는 어른들의 당부를 들으며 자라났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로 부산과 한 가족이 되었고 ‘잃어버린 10년’ 동안 저쪽 동네 때문에 지역 경제 다 죽어간다는 말을 듣곤 했다.
최근 프로야구가 전국민적 인기를 얻고 있다. 경기장마다 만원을 이루고 주위 어디서나 야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전라도 지방의 향토 음식인 홍어가 기아 팬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자리잡은 듯하다. 특정 팀 팬들을 별명으로 부르는 것이야 대수롭지 않은 일이겠지만 왠지 홍어라는 표현에는 해태타이거즈의 불타는 버스가 오버랩된다.
홍어가 등장한 것은 2008년 촛불집회 이후인 듯하다. 소수에 대한 낙인찍기를 통해 다수를 동원하는 것은 통제의 기본 수단이다. 인종적 분절이 없는 한국에서 지역적 분절은 권위주의 시절부터 대중을 움직여내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다. 집권 세력에 대한 거세지는 비판에 직면해 ‘다수’는 한국사회에서 너무나도 익숙한 분절선을 토대로 상황을 반전시켜 나갔으리라. 태생부터 지역 구분에 기반한데다 대중들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있는 프로야구가 훌륭한 매개체가 됨은 당연할 것이다.
대중들의 삶이 점점 팍팍해진다는 점에서 지역감정의 격화는 이해할 만하다. 현실을 정확히 이해하기 어려운 조건 속에서 곤경의 원인이 되는 적을 설정하는 것 그리고 영웅을 기다리는 것은 충분히 자연스럽다. 그러한 신화 속에서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는 선거는 신앙을 고백하는 종교로 변하게 된다.
그러나 옆동네 ‘포항사람’에 대한 믿음은 실망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 종부세 폐지로 인해 지자체 재정이 악화되는 상황에서 그리고 수도권 규제완화로 인해 지방 경제가 위축되는 상황에서 살림살이는 나아질 방도가 없다. 그럼에도 인과관계는 가려진 채 지방과 지방의 대립만이 가시화될 뿐이며 이제 믿음은 ‘구미사람’에게 옮겨간다.
지역감정은 애향심에 대한 모독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을 사랑하는 것과 봉건영주에 대한 소작농의 충성심이 같은 것이 될 수는 없다. 주인됨이 아니라 주인님을 섬기며 자신의 삶을 더 좋게 가꾸어나갈 수는 없다.
오월 그 때 그 곳, 마지막 밤 마지막 순간의 150명을 기억해본다. 지독한 외로움과 두려움 속에서도 그들이 간절히 바랐던 것들을 생각해본다. 그들의 외로움과 두려움이 계속되는 것만 같아, 오월이 다시금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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