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의 대화] 소설가 염승숙

“이거 진짜 바나나 주스일까요?”

봄바람이 기분 좋게 이마를 스치던 5월 어느 날, 동국대 근처 카페에서 만난 소설가 염승숙은 기자가 주문한 바나나 주스를 보자 유쾌하게, 그러나 사뭇 진지한 질문을 던졌다. 뚜렷하게 ‘바나나 주스’라고 적힌 메뉴판을 앞에 두고 이 무슨 뚱딴지같은 질문. 하지만 환상과 현실, 가짜와 진짜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보이지 않는 것’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의 소설 『채플린, 채플린』, 『노웨어맨』을 읽어 본 독자라면 무심코 흘려들을 수만은 없을 것이다.

환상, 보이지 않아 믿고 싶은

2005년 『현대문학』에 「뱀꼬리왕쥐」를 발표하며 등단한 염승숙의 첫 소설집 『채플린, 채플린』이 세상에 나오자 그에겐 ‘환상 소설가’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었다. 뱀의 꼬리를 가진 뱀꼬리왕쥐가 돼버리는 물리치료사(「뱀꼬리왕쥐」), 역(逆)진화해 ‘이구아노돈의 이빨’을 가지게 된 민원접수공무원(「거인이 온다」), “여봇씨요”라는 말에 뒤돌아보면 콧수염이 생기고 바지가 허리춤으로 올라가 채플린의 모습으로 화석이 되는 사람들(「채플린, 채플린」)의 이야기들을 읽다보면 분명 그럴듯한 수식어 같다. 하지만 정작 작가 본인은 ‘환상 소설가’라는 평에 적잖이 당황했다고 한다. “의도했다기보다는 그 이야기에 어울리는 알레고리, 우화 기법으로 환상을 이용했던 건데, 제시된 환상만 이야기하시니 기분이 이상했죠.”

우리는 사는게 힘에 부쳐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환상을 갖는다. 염승숙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존재감이 희미한, 그래서 하루하루 사는 게 힘이 드는 사람들이다. 그에게 환상은 “자그마한 위로의 공간이자 그들의 삶이 얼마나 절실한지 보여”주는 장치다. 「채플린, 채플린」에서 “여봇씨요”라는 낯선 이의 부름에 ‘채플린’이 돼버리는 사람들은 모두 신용불량자, 퀵서비스맨, 가짜 웨딩게스트 아르바이트생 등 너무나 평범하고 하찮아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다. 그러나 ‘채플린’이 된 그들은 달의 나라로 옮겨져 그곳에서나마 환하게 웃을 수 있다. 이처럼 현실에선 보이지조차 않던 존재들은 환상의 세계에서야 자기 존재를 확인한다.

나, ‘진짜’ 맞아?

하지만 고된 현실의 유일한 돌파구가 환상일 수밖에 없었을까. 작가는 “다만 환상이 이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으면 했지만 대안적인 이념이나 구체적인 해결책이 없어 현실 도피적이지 않냐는 지적에 일견 수긍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그가 내놓은 두 번째 소설집 『노웨어맨』은 현실에 보다 밀착된 모습을 보여준다. 그 모습은 보다 현실적이고, 그래서 더 슬프다. 환상 속에서나마 위로를 받았던 사람들이 ‘가짜’로 취급받는 모습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짝퉁의 세계에서는 ‘품절’이라는 게 없어요. … 얼마든지, 다시 찍고 만들어낼 수 있어요. 모두가 가짜죠. 진짜란 없어요. 가짜의 세계에, 품절이란 결코 있을 수 없단 얘기예요. 그런데 하물며……파산이라니요. 노웨어맨이라니요. 물건도 동이 나질 않는데, 대체 그게 뭐란 말이에요, 아버지. (「노웨어맨」)

‘루이비통st’, ‘마르니st’처럼 ‘진짜 같은 가짜’를 찾는 세상에서 소설 속 개인파산자, 주민등록 말소자, 청년 실업자들은 ‘진짜’지만 아무 것도 아닌 사람,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노웨어맨) 취급받는다.

“우리의 세계에서는, 모두가 주인공이 될 수는 없다는 것. 그러니 88올림픽에 설렜던 아이가 자라 88만원 세대가 되는 것이 결코, 전혀 말이 안 되는 일만은 아니라는”(「레인스틱」) 사실은 잔혹하기까지 하다. “97년 외환위기를 몸소 겪으면서 경제 지표로 얼룩진 이 세계가 무섭고 두려웠다”는 그. 『노웨어맨』은 ‘가짜’의 세계에서 ‘진짜’여도 ‘진짜’로 인정받지 못해 아무 것도 아닌 사람,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사람, ‘노웨어맨(no-where-man)’들의 이야기다.

나는 본래, 내 것이란 걸 갖고 있는 사람인 걸까. 아닐까. 진짜는 무엇이며, 가짜는 무엇이지? 나의 진짜와 또 나의 가짜를, 나는 어떻게 분별해낼 수 있을까. (「무대적인 것」)

염승숙은 가짜가 진짜를 압도하는 아이러니한 세상에 대한 인식을 존재론적 탐구로 확장한다. “재밌지 않나요? 여기 주변에 장충동 족발집들만 봐도 서로 원조라고 하는데 누가 진짜 원조일까요? 원조가 있긴 할까요?” 내가 지금 떠올리고 있는 생각들, 내뱉는 말들, 하고 있는 행동 모두 오롯이 진짜 ‘나’의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첫 소설집이 나오고 이런 의구심이 더욱 강해져 6개월 정도 인터뷰 제의를 거절했다고 한다. “제 소설에 대해 이러이러하다고 소개하는데 정말 내가 평소에 이런 생각을 했을지, 너무 작가적인 포즈를 취하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거짓말이 ‘진짜’다

1을 주면 꼭 1만큼만 주는 “지독하게도 정당한 거래의 법칙”이 지배하고 텔레비전, 영화, 컴퓨터에서 범람하는 ‘가짜’에 둘러싸인 세상에서 진짜 자기를 입증할 길은 봉쇄돼고 있다. 가짜와 진짜의 경계가 모호한 이 시대에 ‘진짜’에 이르는 길은 회복될 수는 없는 것일까.

염승숙은 「라이게이션을 장착하라」에서 오히려 가짜를 통해 진짜에 이르는 방법을 시도한다. 내비게이션이 안내해주는 ‘정확하고 안전한 길’을 우리는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모르면서 ‘지루하게’ 따라갈 뿐이다. “도대체 내비게이션이 없을 때는 어떻게 살았을까요? 우리가 어디로 갈지 모두 판단해주는 내비게이션이 정말 위험한 물건이 될 수 있어요.”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늙어가는 그 모든 삶의 노선에서 어쩌면 단 한번만이라도 정석대로 가고 싶지 않은 길쯤, 있어도 좋지 않을까 하는 기대.(「라이게이션을 장착하라」)

그래서 그는 차라리 거짓된 정보를 말하는 ‘라이게이션(Lie+Navigation)’을 따라가다보면 진짜 ‘나’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진짜가 가짜로 여겨지는 현대 사회의 운명이 이미 모순이라면 가짜를 통해 진짜를 찾는 또 다른 모순을 감행하는 시도도 해볼 만하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결국 작품 속에서 라이게이션을 따라간 이들은 모두 실종된다. 작가는 자신의 시도에 대해 “결과적으로 ‘진짜’가 되기 위한 저만의 시도에 확신이 없었던 것 같아요.”라고 털어놓았다.

당신에게 내미는 손

하지만 그를 ‘가짜’ 세상에 지쳐 쓰러진 작가로 여긴다면 큰 오산이다. 비록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의 슬픈 이야기를 다루지만 그는 특유의 발랄한 문체로 이들을 따뜻하게 어루만진다. “이리 기울, 저리 기울, 사는 게 다 기울기울”(「곡선을 걷는 시간」)이더라도 소설은 ‘“가짜 같은 진짜’들의 두 손을 따끈히 맞잡아주어야겠다고 생각”(「당신과 악수하는 오늘」)한다.

다만 그 순간에 나는, 아무 자리에라도 앉아 조금 쉬고 싶다는 마음만을 간절히 느꼈다.(「레인스틱」)

“이 마지막 구절을 위해 「레인스틱」을 썼어요.”라고 말하는 그녀. 존 레논이 「Nowhereman」에서 “어디에도 없는 사람, 걱정 말아요/ 숨을 돌려요, 서둘 것 없어요/ 다 잊어버리고 누군가 손 내밀 때까지 기다려요”라고 노래했듯 잔혹한 ‘프로’의 세계에서 잠시 서 있을 곳도, 앉아 있을 곳도 없는 노웨어맨들에게 건네는 그녀의 따뜻한 손길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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