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규민 학술부장
치부가 드러날 때마다 곤두박질치는
우리 사회의 ‘유명 인사’들
인생의 롤 모델로 삼을 수 있는
‘된 사람’을 찾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

“중학생 때 아인슈타인 전기를 읽고 결심했지.” 30여년 행복한 물리학자로 살았다는 한 교수님은 희대의 천재 과학자에 대한 동경에서 과학도가 되기로 마음먹었단다. 이미 ‘전설’이 돼버린 아인슈타인의 영향력은 새삼 더 감탄할 게 없었지만 ‘어두웠던’ 시절 한 중학생이 빛바랜 문고본 전기를 읽으며 과학자의 꿈을 키워나가는 장면은 인터뷰어인 나를 약간은 가슴 아프게 했다. 교수님 말씀대로 당신이 공부하던 ‘열악한’ 시기, 우리가 가질 수 있었던 우상은 아인슈타인과 링컨, 케네디 정도가 아녔을까 하는 다소 비뚤어진 나의 상상 때문이었으리라.

소위 한국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기여한 ‘스타’의 탄생으로 우리가 얻은 작은 혜택이 있다면 만난 적도 없는 외국인만 우상으로 삼아야 했던 환상의 시절을 졸업했다는 것이 아닐까. 링컨과 아인슈타인을 읽던 우리는 이제 제2의 이휘소를 꿈꾸고, 반기문을 동경하며, 김연아에 열광할 수 있게 됐다. 내 땅에서 나온 인물을 우상으로 삼을 때 보다 강한 동기와 희망을 얻을 수 있다면 그건 민족성의 꽤 괜찮은 순기능으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세종대왕과 이순신의 ‘팬’이 됐던 시기와 달리 현실적인 진로와 목표 달성의 방법까지 입수할 수 있다면 그건 우리가 얻게 된 ‘실리’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A대를 빛낸 인물들’이라는 섹션에서 학과별로 유명 인사를 깔끔하게도 편집해놓은 어느 단과대의 홈페이지에서는 학생들에게 그 동기와 목표를 심어주려는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이름만 들으면 금방 알 정계 실력자와 고위 공무원, 대중적으로 유명세를 얻은 연예인들은 자신의 전공과 현재 몸담고 있는 분야를 연계시키며 학생들에게 찬란한 희망을 불어넣는다.

하지만 이러한 ‘명사(名師)’들을 ‘롤모델’로 부르는 게 껄끄러운 이유는 뭘까. 단과대를 ‘빛나게’ 한 인물 가운데 몇몇이 정치권의 구설수와 지저분한 루머에 휘말리는 것을 보면 ‘빛나게’라는 단어의 사회적 의미까지 의심해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만약 유명세만을 기준으로 우리의 본보기를 선정했다면 한번쯤 그 단순한 사고에 볼멘소리를 하고 끝날 테지만 우리의 불편함은 그렇지 않을 때 오히려 심해지는지도 모른다. 스크린과 언론이 채색해놓은 명사들의 이미지를 뚫고 그 실체를 직시하는 건 우리 사회에서 이미 꽤나 어려운 일이라서. 아니 그 실체를 반영해서 학생들의 롤모델을 만들어주려고 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라서. ‘된 사람’이 아니었던 ‘난 사람’들의 숨겨진 치부가 드러날 때마다 홈페이지를 업데이트하기도 우스운 노릇 아닌가.

만약 한국을 빛나게 한 스타를 좇아 꿈을 키우다가 ‘빛나게’의 국제적인 의미까지 회의하게 되는 상황만은 피하고 싶다면 우리의 롤모델을 정하는 것은 단순한 민족성 혹은 국적과 현실 적합성에만 의존할 수 없을 것 같다. 아인슈타인이 우리의 우상이었던 환상의 시절은 졸업했다지만 우리는 어쩌면 또 다른 환상의 시대로 접어드는 위기에 서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 환상에 빠지지 않으려면 오히려 왜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을 존경했었는지, 그들이 국민들에게 어필한 매력이 무엇이었는지를 다시금 되새기는 게 현명한 일일지도 모른다.

서머셋 몸은 『달과 6펜스』에서 이렇게 썼다. “찰스 스트릭랜드의 위대함은 장군이나 정치가의 그것과는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후자의 경우 그 지위를 잃고 나면 위대함은 사라지지만 스트릭랜드의 위대함은 인간 존재 자체의 위대함이었다.” 열심히 업데이트되는 단과대 홈페이지의 인물 섹션보다는 케케묵은 명작을 보는 게 차라리 속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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