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그러운 에너지 가득한 젊은 대학생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진 나는 행복한 존재다. 강의실에서 이들과 웃고 떠들다보면 내가 불혹의 나이에 발을 담그기 시작했다는 자명한 사실을 잊은 채 이들이 분출하는 매혹적인 자장 속으로 순식간에 빨려든다. 이것은 하나의 특권이다. 그래서 나는 내 수업을 들었던, 그리고 들을 학생들에게 고백하기에는 약간 쑥스러운 고마움을 마음에 품는다.

수업을 진행하면서 나는 학생들이 내 세대와는 다른 보다 확장되고 풍요로운 시공간 속에서 성장해 왔음을 실감한다. 그래서 이들이 부럽다. 하지만 못내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 현재 우리 사회의 분위기 탓인지는 몰라도 항상 푸르러야 할 이들이 전공 공부와 취직 공부에 함몰돼 고유한 푸름의  색채를 잃어가는 모습을 나는 가끔씩 보게 된다. 교양 수업 시간에 전공 서적을 펼쳐 읽는 학생들을 처음 봤을 땐 은근히 화가 치밀기도 했지만 우리를 둘러싼 상황이 이들을 그렇게 이끌었다는 생각이 들어 그냥 넘어가고 있다. 대신 나는 전공에 치이고 있는 학생들에게 내 수업이 편안한 휴식과도 같은 역할을 하고 싶다고 너스레를 떨며 수업 그 자체를 즐기자고 제안하고 있다.

현대사회는 고도로 전문화된 사회로 이것을 지탱할 인력을 양성하는 대학은 사회의 요구에 따라 당연히 전문 지식을 갖춘 인력 배출에 교육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인문학을 중심으로 한 교양과목을 졸업장을 따기 위해 억지로 이수해야 할 천덕꾸러기처럼 생각하는 학생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사회는 다양한 전문 지식을 지닌 구성원들의 물리적 조합으로써 운영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조합을 구성하는 각 부분들 사이의 간극은 전문 지식으로는 메울 수 없다. 전문성은 자신의 영역을 확고히 지키려는 본성이 있기 때문에 상호 간의 침범과 간섭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비유가 떠오른다. 우리는 현재 전문성의 어두운 동굴에 갇혀 하나의 형상만을 바라보면서 그것만을 진리라고 믿고 있지 않는가?

교양과목을 대충 학점만 잘 받으면 되는 과목이라는 고정 관념을 뒤집어보자. 즉 좁고 어두운 동굴에서 뛰어 나와 밝고 넓은 광장에서 나를, 우리를, 세계를 바라보자. 따분하다고 생각했던 문학과 역사 그리고 철학이 우리의 시야를 보다 선명하게 해 줄 것이다. 또 각 분야 간 경계를 허물면서 끊임없는 상호 작용의 시동을 걸어 줄 것이다.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는 『국가론』에서 스키피오의 입을 통해 “인문학에 교양이 있는 자만이 인간”이라고까지 주장하면서 인문학과 교양을 인간이 갖추어야 할 최고의 덕목으로 간주한다. 현실은 끊임없이 자기 변신을 하는 유기체다. 특정 지식만을 갖춘 스페셜리스트는 이것의 일면만을 볼 수 있다. 반면 인문학을 중심으로 한 교양의 폭넓은 바탕 위에 건설된 전문 지식을 갖춘 자는 전체의 모습을 조망할 수 있다. 나는 이런 사람을 진정한 제너럴리스트라 부르고 싶다.

새 학기다. 또 가을의 시작이다. 곧 붉게 물들 낙엽수 아래에서 시집을 읽는 제너럴리스트를 만나길 기대한다. 혹시 모를 일이다. 그 모습에 취한 내가 가까이 다가가 막걸리 한잔 하자고 제안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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