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나온 책] 죽을 만큼 아프진 않아

황현진 지음ㅣ문학동네ㅣ284쪽ㅣ1만원
마음에도 없이 대학에 진학하겠다 말했던 공고 3학년 수험생을 대학 문제로 혼자 한국에 두고 부모는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용산구 한강로 101-9번지, 가족과 함께 해 따뜻하지만 가난했던 곳을 떠난 용화공고 3학년 태만생은 말 그대로 혈혈단신의 처지에 놓인다. 『죽을 만큼 아프진 않아』는 홀로 남겨진 만생이 살아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담은 성장소설이다.

만생은 친구 태화와 함께 이태원의 한 짝퉁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이태원(異態園). 말 그대로 ‘다른 모양의 것들로 이루어진 동산’이다. 왜란과 개항기, 미군정기를 통해 생겨난 ‘다른 모양’의 사람들이 대대로 터를 잡았던 곳이다. 이뿐 아니라 진품이 짝퉁이 되고 짝퉁이 진품이 되는 동네, 그곳이 이태원이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지 못하는 이태원에서의 삶, 가게와 창고를 가득가득 채우는 명품과 다르지 않게 생긴 짝퉁들. 만생은 온갖 짝퉁이 판을 치는 이태원 생활 곳곳에서 ‘다름’과 마주한다.

이 한 편의 소설은 만생이 이태원에서 일한 나흘 남짓의 기록이다. 작가는 만생의 이태원 취업기를 큰 비중으로 생생하게 그려냄으로써 만생이라는 인물이 이태원이라는 공간 속에서 어떠한 생각의 변화를 겪는지 세밀하게 그려낸다. 류보선 문학평론가는 이에 대해 “인물에 대한 그리 많지 않은 삶의 내력과 언행만으로도 살아 꿈틀거리는 성격을 만드는 특출난 능력”이라고 평했다.

만생이 불법 짝퉁 판매를 잡기 위해 잠복해있던 단속반에게 덜미를 잡힌 그 날, 그는 유난히 아팠다. 그의 아버지가 자랑스레 말했던 “허투루 돈 번 적 없다”는 말은 만생의 귓가에 맴돌았고 먹고 사는 것이 쉬운 줄만 알았던 만생은 그 자신이 벌을 받는 것이라 생각했다. 만생이 아프다고 하자 함께 일하던 친구 태화는 가격을 외던 버릇이 남아서였는지 ‘얼마나?’하고 묻는다. 만생은 “죽을 만큼 아프진 않아”하고 대답한다. 아프긴 하지만 죽을 만큼은 아니라는 말. 세상을 알아가는 동안 아픔을 겪고 있지만 혼자서도 살아갈 수는 있겠다는 뜻은 아닐까.

그는 강릉 앞바다에서 발견된 큰 트렁크 가방 속에 신원미상의 한 부부가 숨져있었다는 뉴스를 본다. 부모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그가 그들에게 사줬던 큰 검은색 트렁크 가방을 떠올린 그는 ‘강릉의 바다가 자신과 자신의 부모와 얼마나 무관한 장소인지’ 직접 확인하기 위해 강릉으로 떠난다. 하지만 만생은 시신이 부모인지 확인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뜬금없이 이태원에서 만난 적 있는 한 트랜스젠더 가수가 강릉의 어느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찾아가기로 한다. 만생은 부모가 실제로 미국에 갔든 아니면 강릉 앞바다에서 시체로 발견됐든 혼자 힘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음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세상을 처음으로 경험했던 만생이 세상을 깨달은 장소가 진품과 짝퉁의 경계가 모호한 이태원인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작가는 ‘같고 다름’과 ‘맞고 틀림’을 구분할 줄 모르는 현대인에게 만생이 이태원 생활에서 ‘틀림’이 아닌 ‘다름’을 경험하며 한층 더 성숙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을까. 진짜와 가짜를 명확히 구분 지을 기준도 없으면서 겉모습만으로 판단하고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틀렸다’고 말하는 오늘의 세태에 “‘차별’이 아닌 ‘차이’를 인정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작품의 말미에 다름을 받아들이고 트랜스젠더를 찾아가 키스를 하고 싶다는 만생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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