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영문학과
교내에서 차를 몰다보면 어색한 상황을 맞을 때가 있다. 바로 횡단보도에서다. 먼저 가라고 차를 세우면 마치 무슨 뜻인지 모른다는 듯 아니면 못미덥다는 듯 차 안에 있는 나를 쳐다보며 건너려 하지 않는다. 결국 잠시 서로 눈치를 보면서 가만히 있다가 차가 먼저 횡단보도를 가로질러 가 버린다. 운전대를 잡고 있지만 난 보행자로서 이 상황을 보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교내에서 차를 몰고 다닐 때보다는 걸어 다닐 때가 많아서 그저 동감이 가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니면 이 상황이 묘한 권력관계를 연상시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서로 모르기에 누가 힘이 더 센지는 알 수 없다. 누군가는 차를 몰고 누군가는 걷기에 서로 부딪치면 하나는 멀쩡하고 다른 하나는 크게 다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한쪽은 ‘피하겠지’라고 생각하고 다른 쪽은 ‘조심해야지’라고 생각한다. 사회에선 신호등을 설치하거나 교통경찰을 배치하고 지하보도나 고가도로를 설치해 비슷한 상황이 힘겨루기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지만 대학은 다르다. 신호등도 없고 무단횡단 했다고 벌금을 내지도 않는다. 암묵적으로 누가 우선시돼야 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바로 보행자다. 보행자가 더 힘이 있어서가 아니다. 물론 권력이 있어서도 아니고. 그저 대학은 걷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냥 어디를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노래를 들으면서 얘기하면서 생각하면서 아니면 그냥 그러고 싶어서 걸어 다니는 곳이다.

이렇듯 내겐 아직도 대학은 걸어 다녀야 하는 곳이다. 물론 편의를 위해, 업무를 위해 다니는 차를 뭐라 하는 건 아니다. 효율적인 생활을 위해 다 필요할 테니까. 하지만 대학은 효율성이 우선되는 곳이 아니다. 사회로 나가기위해 준비된 잘 닦은 신작로가 아니라 사회로 나가기 전 돌아서 가봄직한 동네 골목길이다. 이 골목길을 따라 걷다보면 때론 익숙한 곳에 다다르고 때론 막다른 길목에서 서성이고 그러면서 골목 사이사이에 누가, 무엇이 있는지 알아가면서 동네를 익힌다. 사회에 나가는데 동네를 익히는 것이 무슨 쓸모가 있을까 싶지만 대형마트에 떠밀려 사라져가는 골목가게를 아쉬워한다고 그것이 꼭 쓸모가 있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골목길을 배회하듯 하는 비효율적인 걸음은 ‘플라뇌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산보객, 서성이는 자, 심지어는 게으름뱅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 말은 보들레르를 비롯해 19세기 파리를 걸어 다니던 이들에게 그렇게 부정적이지도 혹은 단순하지도 않았다. 이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던 발터 벤야민은 도시화와 상업화로 대변되는 당시의 시대상을 고려해 플라뇌르를 다양한 측면에서 생각해 봤다. 그 중 하나로 플라뇌르를 ‘탐정’에 비유하면서 “나태함이란 그럴법한 겉모습 뒤에, 의심받는지 눈치 못 채는 악인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는 관찰자의 주의력을 숨기고 있다”고 했다. 그러한 주의력으로 바라본 파리는 플라뇌르에게 익숙하고 흥미로운 동시에 비판의 대상이었다. 어쩌면 골목길을 걷듯 교내를 걷다 보면 대학이란 동네도 그렇게 보일지 모른다. 대도시마냥 효율성을 추구하고 백화점마냥 상업성을 강조하는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서 말이다.

얼마 전 모 대학에서 교내를 걸어가던 학생이 차에 치여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혹자는 그 학생이 전화를 하다 차를 보지 못해 사고를 당했다고 하면서 항상 휴대폰이나 아이팟을 끼고 사는 학생들을 보면 충분히 예견된 일이라고 한다. 다른 이들은 차량이 계속해서 늘어남에도 충분한 교통표지판과 안전신호가 없기에 예상했던 일이라고도 한다. 이런 사회적 해석과는 달리 개인의 죽음을 상징적으로 읽어낸다면 윤리적 비난이 따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를 감수하고서라도 이 사건이 가진 상징성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효율성과 상업성을 앞세운 권력에 치여 점점 더 걷기 힘들어지는 대학의 미래를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