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사학과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인 기원전 420년대에 공연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서, 오이디푸스는 누구도 풀 수 없었던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 정도로 뛰어난 지혜를 지닌 자였다. 그는 그 수수께끼를 신들의 도움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지혜(gnomē)로 풀어냈다고 유명한 점쟁이 테이레시아스에게 대꾸한다. 비극작가는 오이디푸스를 소피스트적 지혜의 화신으로 그려내고 있다. 주인공이 스스로 두 눈을 찌르고 방랑의 길을 떠나게 된 것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된 기구한 팔자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지혜에 대한 오만한 자부심 때문이었다. 소포클레스는 이 비극을 통해 그 당시 아테네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던 소피스트적 지혜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 있다.

소피스트적 지혜란 어떤 것인가?  플라톤의 『국가』에서 소크라테스와 토론을 벌이던 소피스트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란 강자의 이익”이라고 주장한다. 정의란 하나의 공동체 전체를 위한 개념이 아니라 그 사회의 지배집단인 강자들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한 허울 좋은 개념일 뿐이라는 뜻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정의란 제우스 같은 신들이 각자의 몫을 존중해주며 조화롭게 살라고 인간들에게 내려준 것이었다. 전통적인 가치관을 지닌 그리스인들에겐 만물의 척도가 신들이었으나 소피스트들에겐 만물의 척도가 인간이었다. 왜? 그들에 따르면 인간만이 이성(gnomē)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피스트적 이성은 자기 자신에게만, 자신의 이익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던 셈이다.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그리스의 패권을 놓고 다툰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에, 아테네는 중립국인 멜로스 섬으로 원정한다. 그러나 가능하면 전투를 벌이지 않고 항복을 받아내려고 멜로스 시를 포위한 후 사절을 보내 담판을 벌인다. 회담이 시작되자마자 아테네 사절이 정의가 아니라 이익을 담판의 기준으로 삼자고 하자, 멜로스인들은 어쩔 수 없이 이를 받아들인다. 아테네 사절은 멜로스인들이 항복하면 전멸되지 않아서 좋고 아테네인들은 멜로스인들로부터 조공을 받을 수 있으니 두 나라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자 멜로스인들은 중립국인 자국을 공격하지 않는 것이 정의로 보아서도 올바를 뿐만 아니라 이익의 견지로 보아서도 지금껏 중립을 지켜오던 나라들을 적으로 만들지 않을 것이니 장기적으로 아테네에게 이익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회담은 결렬되고 아테네군은 멜로스를 함락해 모든 성인 남자를 처형하고 아녀자를 노예로 삼고 아테네인들을 그 섬에 이주시킨다.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아테네의 진정한 이익이 어디 있었는지를 말하고 있다. “어느 쪽의 동맹국도 아닌 국가들은 비록 그들이 원조 요청을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제는 더 이상 전쟁과 무관할 수 없게 되었으며 기꺼이 아테네인들에게 맞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투키디데스는 멜로스인들의 입을 통해 정의를 지키는 것이 결국에는 장기적으로 이익임을 말하려 한 것이다.

극심한 경쟁 속에서 살다보니 현대인들의 이성은 주로 자기 자신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작동하고 있다. 이럴수록 마음의 여유를 내 주위를 둘러봐야 한다. 더 큰 이익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이웃들에게도 그리고 더 넓게는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생태계에도 우리의 이성이 미칠 때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정의를 지키는 것은 타인의 몫을 존중하면서도 자신을 위해 떳떳하고 오래 지속되는 이익을 확보하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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