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과 박사과정
나는 김광석을 좋아했고, 여전히 좋아한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너무 쓴 진실을 받아들여야 할 때 “‘그 애의 웃는 모습은 활짝 핀 목련꽃’처럼 예뻤지”(「그녀가 처음으로 울던 날」)라고 주억댔고, 빡빡 머리가 우스꽝스러운데 자꾸 눈물이 나던 춘천에서 “이제 다시 시작이다”(「이등편의 편지」)라고 자위했었다. 삶에 지쳐 주저앉고 싶을 때는 “일어나, 봄의 새싹들처럼”(「일어나」)이라며 격려해 주었다. 그는 내게 위로였다.
 위로받고 싶은 청춘이 어찌 나뿐이랴? 서슬 퍼런 상대평가의 칼날은 오늘도 20대의 그/녀들을 전장으로 내몰고, 취업의 길은 오디세우스의 귀향길처럼 험난해 보인다. 낙오자가 될 수 없다는 몸부림 속에서 그/녀들은 꿈도, 하나뿐인 ‘나’라는 존재의 귀중함도 망각해 간다. 그래서 20대는 위로를 원하고, 또 구한다. 

 나도 당신도 위로받지 않고 살 수 없다. 하지만 위로받고, 다시 상처입고, 위로받고, 다시 아파하는 돌고 도는 회귀 속에서 우리는 진정 행복할 수 있을까? “괜찮아. 잘 될 거야. 너에겐 눈부신 미래가 있어”라는 위로만으로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까?

 잠시 성경의 한 토막에 눈을 돌려보자. 하루는 예수가 베데스다 연못이라는 곳에 찾아갔다. 소문에 따르면 천사가 가끔 이 연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할 때 가장 먼저 이 연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이든지 낫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천사가 오면 가장 먼저 연못으로 뛰어들어 병 낫기를 소망하는 각종 병자들이 그 연못가에 가득했다. 이 많은 병자 중에 예수는 병이 생긴 지 38년이 돼 일어서지도 못하는 연못가에 누워있는 한 환자에게 다가간다. 누구보다 빨리 연못에 뛰어들기를 38년간 갈망했지만, 자기 힘으로는 결코 남들보다 빨리 연못으로 뛰어들 수 없는 병자. 그는 예수가 자기를 안아 들고서 연못으로 달려가 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예수는 그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제 그는 더 이상 병자가 아니다.

 일등만이 살아남는 연못. 남을 짓밟고 달려가야만 나의 유익을 누릴 수 있는 연못. 이 연못의 룰(rule) 속에서 병자에게는 행복이 없다. 그에게 정녕 필요한 것은 “다음에는 꼭 연못에 들어 갈 수 있어”라는 위로도 아니고, 나를 연못으로 가장 먼저 옮겨 줄 누군가는 더더욱 아니었다. 38년간 자명해 보였던 룰을 깨는 전혀 다른 해결책이 그를 참된 행복으로 인도해 주었다.

신자유주의라는 폭주기관차는 탈선해 버렸지만 그 룰이 사회 속에 그리고 우리네 몸에 새겨져 있는 한 우리네 삶도 그다지 행복할 리 없다. 그 속에서 우리는 영원히 ‘3포 세대’다. ‘나’가 아니라면 ‘너’가 연애를, 결혼을, 출산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 전혀 다른 길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경쟁과 승자 독식의 룰 속에서 던져지는 위로를 넘어서는 다른 길이 분명 필요하다.

 전혀 다른 길을 우리에게 던져 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지만은 말자. 우리에게는 용기와 상상력이 필요하다. 아직 가보지 않은 그 길에 대한 두려움이 당신을 이 길 위에 머물러 있게 하지마라. 용기를 내라. 너무 익숙한 지난 삶의 자취가 당신을 이 길 위에 붙잡아 두려 할 때 그 손을 뿌리쳐라. 다른 길 위의 당신을 상상하라. 우리 제발 행복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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