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받고 싶은 청춘이 어찌 나뿐이랴? 서슬 퍼런 상대평가의 칼날은 오늘도 20대의 그/녀들을 전장으로 내몰고, 취업의 길은 오디세우스의 귀향길처럼 험난해 보인다. 낙오자가 될 수 없다는 몸부림 속에서 그/녀들은 꿈도, 하나뿐인 ‘나’라는 존재의 귀중함도 망각해 간다. 그래서 20대는 위로를 원하고, 또 구한다.
나도 당신도 위로받지 않고 살 수 없다. 하지만 위로받고, 다시 상처입고, 위로받고, 다시 아파하는 돌고 도는 회귀 속에서 우리는 진정 행복할 수 있을까? “괜찮아. 잘 될 거야. 너에겐 눈부신 미래가 있어”라는 위로만으로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까?
잠시 성경의 한 토막에 눈을 돌려보자. 하루는 예수가 베데스다 연못이라는 곳에 찾아갔다. 소문에 따르면 천사가 가끔 이 연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할 때 가장 먼저 이 연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이든지 낫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천사가 오면 가장 먼저 연못으로 뛰어들어 병 낫기를 소망하는 각종 병자들이 그 연못가에 가득했다. 이 많은 병자 중에 예수는 병이 생긴 지 38년이 돼 일어서지도 못하는 연못가에 누워있는 한 환자에게 다가간다. 누구보다 빨리 연못에 뛰어들기를 38년간 갈망했지만, 자기 힘으로는 결코 남들보다 빨리 연못으로 뛰어들 수 없는 병자. 그는 예수가 자기를 안아 들고서 연못으로 달려가 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예수는 그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제 그는 더 이상 병자가 아니다.
일등만이 살아남는 연못. 남을 짓밟고 달려가야만 나의 유익을 누릴 수 있는 연못. 이 연못의 룰(rule) 속에서 병자에게는 행복이 없다. 그에게 정녕 필요한 것은 “다음에는 꼭 연못에 들어 갈 수 있어”라는 위로도 아니고, 나를 연못으로 가장 먼저 옮겨 줄 누군가는 더더욱 아니었다. 38년간 자명해 보였던 룰을 깨는 전혀 다른 해결책이 그를 참된 행복으로 인도해 주었다.
신자유주의라는 폭주기관차는 탈선해 버렸지만 그 룰이 사회 속에 그리고 우리네 몸에 새겨져 있는 한 우리네 삶도 그다지 행복할 리 없다. 그 속에서 우리는 영원히 ‘3포 세대’다. ‘나’가 아니라면 ‘너’가 연애를, 결혼을, 출산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 전혀 다른 길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경쟁과 승자 독식의 룰 속에서 던져지는 위로를 넘어서는 다른 길이 분명 필요하다.
전혀 다른 길을 우리에게 던져 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지만은 말자. 우리에게는 용기와 상상력이 필요하다. 아직 가보지 않은 그 길에 대한 두려움이 당신을 이 길 위에 머물러 있게 하지마라. 용기를 내라. 너무 익숙한 지난 삶의 자취가 당신을 이 길 위에 붙잡아 두려 할 때 그 손을 뿌리쳐라. 다른 길 위의 당신을 상상하라. 우리 제발 행복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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