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화과
서울대에서 가장 빨리 봄을 실감할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답은 1동 옆 쉼터이다. 학생들이 일명 아방궁이라 부르는 이곳에 빙 둘러 서 있는 매화나무들이 봄이라지만 아직 쌀쌀한 3월 중순쯤에 일제히 하얀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사군자의 하나로 화가들과 시인, 문인들의 사랑을 받아온 매화는 이처럼 겨울을 지내고 새잎이 나기도 전에 가장 먼저 여린 꽃을 피워 봄을 알리는 특성 때문에 고난이나 역경을 이겨내는 불굴의 정신을 기리는 선비의 정신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옛 그림에 「탐매도 (探梅圖)」라는 제목이 붙은 그림들은 아직 눈이 남아있는 이른 봄에 동자를 거느리고 걸어서 혹은 당나귀를 타고 매화를 찾아 산야를 소요하는 선비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매화가 가장 한창일 때 1동 옆 쉼터에 가면 이런 탐매의 낭만적인 전통을 계승하여 수묵화 수업의 한 과정으로 매화를 스케치하고 있는 동양화과 학생들을 만날 수 있다. 아, 물론 미대 앞뜰에도 예쁜 매화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그늘진 곳에 심어져 있어서 꽃은 아방궁보다 2주 정도 늦게 피니 인문대에서 매화를 스케치하다가 절정을 넘기면 미대로 자리를 옮겨서 또 새롭게 피어나는 매화의 모습을 관찰하며 즐길 수 있다.

나는 매화가 피어있을 때 학생들에게 눈으로만 보지 말고 꼭 그 향기를 맡아보길 권한다. 자극적이지 않고 은은하지만 멀리까지 퍼지는 암향(暗香)이라 불리는 독특한 매화의 향기는 표현하기 어려운 신비함과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우리 옛 선비 중에는 이런 매화를 유난히 사랑한 사람들이 많았으니 퇴계 이황 선생도 그 중 하나이다. 그는 매화와 관련한 시를 많이 지었는데 그 중 90여 수를 모아서 매화시첩(梅花詩帖)을 만들기도 하였다.

홀로 산창에 기대어 별빛이 차가운데
매화가지 끝에서 둥근 달이 떠오른다
이제 새삼 실바람 불러 올 것 없나니
맑은 향기 스스로 온 동산 안에 가득하다

매화를 심어서 애지중지 가꾸며 꽃이 피면 친구를 청해 함께 즐기고 야심한 밤에 매화를 감상하기 위해 한기를 물리칠 도자기 숯불의자를 고안해 내기도 했다니 그야말로 풍류를 즐기는 선비였다고 생각된다. 오늘날에도 도산서원에는 매화가 여러 그루 자라고 있다.

매화와 관련해 떠오르는 또 하나의 기억은 정초에 은사님 댁에 세배를 하러 가면 집 현관에서 맞이해주던 흰 꽃이 구름같이 피어있는 백매 분재다. 매년 너무나 예쁘게 피어있는 그 멋진 매화 화분 앞에서 젊을 때는 그저 꽃이 참 예쁘다고 감탄을 했지만 이제는 한겨울에 찬 바깥과 온실로 화분을 옮겨가며 제자들이 오는 날짜에 딱 맞춰서 꽃을 피워내시는 선생님의 정성과 제자들에게 맛보여주시는 풍류에 감동하는 나이가 되었다. 세배를 하고 난 후 찻잔 안에 매화 봉오리 두어개를 넣고 따뜻한 녹차를 부으면 천천히 피어나는 하얀 황홀한 꽃을 감상하며 마시는 차의 향과 맛은 맑고 아름다운 일년이 될 것이라는 새해의 약속과도 같았다.

이제 매화꽃은 지고 봄은 저물었다. 하지만 우리는 때가 되면 매화가 돌아온다는 것을 안다. 즐거운 기다림이다.

송근영 시간강사
동양화과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