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화가 이인성(李仁星, 1912~1950) 탄생 100주년

“너 커서 이인성 되겠구나!” 이는 한때 대구에서 그림에 소질 있는 아이에게 하는 가장 큰 칭찬이었다고 한다. 1930년대 조선 미술계를 주름잡으며 천재 화가로 불렸던 이인성(사진), 그는 동시대 다른 작가보다 많은 작품과 성과를 한국 근현대미술사에 남기고 요절했다. 이인성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대학신문』에서는 대중들에게 생소한 이인성의 삶과 예술세계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붉은 흙빛' 띤 우리 땅 화폭에 담아내기까지

이인성이 주로 활동했던 1930년대는 만주사변, 중일전쟁 등으로 혼란스럽던 민족적 시련기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일본에서 유입된 서구문화가 만개한 시기이기도 했다. 1909년 화가 고희동이 일본에서 최초로 들여온 서양화가 점차 정착됐으며 이를 바탕으로 ‘조선적 회화’에 대한 화가와 평론가들의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됐기 때문이다. 이 논의를 시발점으로 미술계는 우리의 지리와 기후를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향토색’을 그림에 사용하려 노력했다.

이와 동시에 1930년대는 국내 화단계에 지역단위 화가들의 결속이 활발히 이뤄진 시점이기도 하다. 특히 이인성의 고향이었던 대구는 경부선이 부설된 후 식민지 내륙 거점으로 성장해 급속히 도시화됐다. 일본인 화가들이 일본과 근접한 대구에 모여 서양화단을 꾸리자 이에 경도된 우리 화가들은 ‘0과회’, ‘향토회’ 등의 단체를 만들기도 했다. 초기 대구화단의 이러한 양상은 별도로 미술교육을 받지 못했던 이인성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사진 제공: 대구 미술관


이인성은 18살 때 계성학교 정문에서 쉬고 있는 노동자들을 보고 그린 「그늘」이 조선미술전람회(조선미전)에서 입선하면서 미술계에 데뷔했다. 그는 집안이 어려워 보통학교만을 겨우 졸업했지만 대구미술사 사장 서동진의 눈에 띄어 그림을 배우게 됐다. 서동진을 비롯한 향토회 선배들 아래서 수채화를 배운 그는 황갈색과 청회색 등의 어두운 색을 주로 사용해 근대적 도시 풍경을 담백하고 산뜻하게 표현했다.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못했던 그는 조선미전에서 특선을 받은 「세모가경」 덕에 지역유지들과 경북여고 시라가 주키치 교장의 도움을 받아 1931년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된다.

이인성이 일본에서 유학했던 시기 일본에서는 1880년대 유럽으로 떠났던 일본인 화가들이 고국으로 돌아와 서양화단을 이끌고 있었다. 당시 일본 미술계는 인상파, 후기인상파, 야수파 등 서양의 근대적 유파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이인성은 꾸준히 모네, 세잔, 보나르, 마티스, 고갱 등 각 유파를 대표하는 화가의 화풍을 답습했다. 그는 이러한 연습을 통해 당시 한국 관전(官展)에서 선호하던 정통 서양화를 능란하게 구사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4년 동안의 일본 유학 생활이 끝나갈 무렵, 방학 중 한국을 왔다간 이인성은 우리의 땅과 문화에 대한 향수에 젖게 됐다. 1930년대 초반, 한국 미술계를 달궜던 ‘향토색론’의 영향이다. 그의 우리 땅에 대한 그리움은 당시 그가 신문에 기고했던 연재기행문에서도 엿볼 수 있다. 1934년 9월 7일부터 닷새간 이인성은 동아일보에 풍경스케치와 서울 북한산 일대를 다니며 쓴 연재기행문 「향토를 찾아서」를 기고했다. 그는 연재기행문에서 “향토의 풋풋한 흙의 향기와 관하면서 걷게 됐다”며 “적토(赤土)를 밟는 것이 청산한 안정을 준다”고 기록했다.

1934년 조선미전에서 특선을 탄 「가을 어느 날」에는 그러한 그의 향수가 잘 구현돼 있다. 작품에 도회적, 서구적 분위기를 담으려 했던 이전과 달리 그는 이 작품에 풍부한 색채감, 연속적 붓질, 탄탄한 구성력을 바탕으로 향토적인 형태와 정서를 불어넣었다. 파란 가을 하늘 아래에 적갈색으로 한국적 체형의 벌거벗은 여인, 일상 속 사물, 친숙한 식물을 그려내 우리의 정서에 익숙한 향토색을 찾고자 한 것이다. 이후에도 「경주의 산곡에서」와 「한정」 등의 작품을 통해 화폭에 흙빛을 담아냈다.

사진 제공: 대구 미술관


이인성은 이렇게 부지런히 다양한 양식을 모색하고 수용해 1930년대에 이르러 자신만의 화풍을 완성했다. 동시대 화가였던 김환기, 이중섭, 박수근 등이 5- 60년대에 이르러서 화풍을 완성한 것에 비해 매우 이른 시기였다. ‘향토적 서정주의’라 불리는 그의 화풍은 근대 서양화에 조선 향토색을 본격적으로 도입해 서정성을 갖추고 있다. 1944년 해당화가 흐드러진 붉은 바닷가와 구릿빛 소녀를 꼼꼼한 붓질과 고운 색채로 공들여 그려낸 「해당화」는 ‘향토적 서정주의’가 완성된 이후 그의 대표작이다.

사진 제공: 대구 미술관


그렇게 천재성을 한창 꽃피우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던 1950년 11월 어느 날, 이인성은 귀가하던 중 통금시간에 걸려 경찰과 시비가 붙게 된다. 그의 집에 쫓아온 경찰은 공포탄을 겨누었지만 실탄을 쏘고 말았다. 오발탄으로 인한 사고였다. 그의 나이 서른아홉, 이른 죽음이었다.

이인성을 바라보는 엇갈린 시선

향토적 서정주의를 완성하며 근대 한국 미술계에 큰 족적을 남긴 이인성이지만 관전화가라는 수식어는 늘 그를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살아있는 동안 꾸준히 조선미전, 제국미술전람회 등 관전에 작품을 선보였고 관전의 추천작가를 맡았던 적도 있기 때문이다.

친일논란 역시 바로 이 지점에서 제기된다. 그가 참여했던 조선미전은 일본에서 한국의 화풍을 일본에 동화시키고자 설립한 것으로, 1930년대 중후반을 지나며 일제는 조선미전에 향토색 짙은 작품제작을 요구했다. 여기서의 ‘향토색’은 우리나라를 전근대적이며 정체된 식민지 풍경으로 묘사하라는 주문을 담은 말이었다. 이인범 교수(상명대 조형예술학과)는 “이인성은 관전과 같은 일제의 제도적 인프라를 통해 성공했다”며 “그에 대한 평가가 일제의 이데올로기와 별개로 이뤄지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인성이 관전화가였다는 사실을 마냥 비난할 수는 없다는 목소리도 존재한다. 전문 미술대학이 없었던 당시에는 유학길에 오르지 않고서는 서양화를 배울 수 없었다. 따라서 조선미전은 서양화라는 새로운 조형작성법을 가르쳐주는 교육의 장이기도 했다. 이인성은 여러 차례 관전에 참여하며 서양화 양식을 구체화할 수 있었다. 이중희 교수(계명대 동양화과)는 “서양화가 싹트던 그 시기에 작가들은 관전과 재야를 구분해야 할 정도로 성숙하지 못했다”며 “관전은 미술계에 등용하는 유일한 통로였기에 이인성도 닥치는 대로 관전에 출품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인성이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에 동조한 것과 다름없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도 존재한다. 화가 손동진은 이인성이 “자신의 색채를 찾는 과정에서 다양한 화풍을 시도했을 뿐”이라며 “향토적 서정주의의 확립 이후에는 식민주의적인 그림을 발견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1930년대 이후의 이인성의 그림에는 일본에서 요구한 향토색이 아닌 이인성만의 ‘향토적 심미주의’가 녹아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림에서 조선적 체형의 인물과 향토적 소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으며, 원색으로 풍경과 인물을 아울러 우리 민족의 서정성을 높였다. 결국 그는 자신의 화풍에 향토색을 입혀 관전에 출품하는 과정을 통해 한국 근대 서양화의 양식적 정립과 성숙을 이끌어낸 것이다. 신수경 강사(목원대 미술교육과)는 “이인성이 보다 자유롭게 한국적 색채를 실험했기에 우리나라 서양화단이 보다 질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후대에 녹아든 '향토적 서정주의'

그가 다진 서양 근대 회화의 기틀은 후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우리나라의 정서, 색채, 소재를 끌어와 서양화에 접목한 시도는 50, 60년대까지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정취적·목가적 리얼리즘이라 불리는 한 지류를 형성했다. 이 계보는 인물과 풍경의 조화와 심화된 향토적 소재주의를 특징으로 한다.

화가 박상옥은 이인성 작품의 화풍을 가장 뚜렷하게 수용한 화가로 손꼽힌다. 대상의 관조를 통한 차분한
그림을 그렸던 이인성처럼 박상옥은 자신의 작품에 인간과 전원이 어우러진 풍경을 담아냈다. 이 양식이 다시 국전에서 임규삼, 이동훈, 이인영 등으로 이어졌다. 한편 이인성의 원색을 이용한 강렬한 색채감을 주로 이어받은 화가로 류경채, 이봉상, 김흥수 등이 있다. 또 박항섭, 박창돈, 최영림은 자신의 작품에 서정성을 짙게 가미하는 방식으로 이인성의 뒤를 좇았다.

현재 이인성과 관련된 연구는 다양한 방면에서 이뤄지고 있다. 그는 풍경화부터 인물화, 수채화부터 유채화와 수묵화까지 소재와 장르를 불문하고 그림을 그린 화가였기 때문이다. 신수경 강사는 “최근 여러 학문 분야에서 이인성을 주목하고 있다”며 “이는 그만큼 이인성이 근대미술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방증한다”고 말했다. 특히 이인성이 말년에 그렸던 동양화를 연구하는 것이나 일본 유학과 수채화를 관련지어 이인성 회화의 계보를 분석하는 것은 최근 새롭게 시작된 연구동향이다.

이처럼 짧은 삶을 살았음에도 한국 근대 미술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이인성. 그가 만약 김환기, 이중섭, 박수근처럼 해방 이후의 한국의 풍경을 조금 더 오래 그려냈더라면 어떤 대작이 나왔을지 안타까운 마음으로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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