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입장에서 신문을 읽을 때 크게 두 가지에 집중하게 된다. 하나는 독자인 ‘나’ 주변에서 현재 시점에 일어난 일들을 파악하는 것이다. 졸업식이 열렸다거나 혹은 교내 교양교육이 개편될 예정이라던가 하는 단편적인 소식과 관련한 기사들을 볼 때 독자는 신문의 서술 방향이나 기사 주제 선정보다는 일어난 상황 자체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된다. 반면, 다른 하나의 경우에 독자는 주변의 상황보다는 신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된다. 지나간 과거를돌아보거나 시간을 두고 심층적으로 조사된 기사들을 읽고서 독자는 신문이 관심 갖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이 어떠한 방향으로 서술됐는가를 파악하게 된다. 그러한 역할을 하는 것이 기획기사 혹은 특집기사이다.

1837호에도 몇몇 기획기사와 특집기사가 있었다. 3면에 실린 연재기획으로는 1836호부터 시작된 「서울대 대학원, 이대로는 안 된다」는 기사가, 7면에는 역시 지난 1836호부터 시작된 탐방연재인 「타자를 품은 묘역」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그리고 10면에는 「호모 이코노미쿠스, 선택 앞에 망설이다」는 이름의 기획기사가, 14면에는 「화가 이인성 탄생 100주년」이라는 특집기사가 실렸다. 여기서 인상 깊었던 것은 앞의 두 기사였다.

먼저 「서울대 대학원, 이대로는 안 된다」라는 기획기사의 경우는 조금 아쉬웠다. 대학원 실상을 다룬 기사는 사실 지난 학기 몇 차례 기사로 다뤄졌고 긍정적 평가와 많은 호응을 얻었다. 학내 구성원임에도 관심으로부터 소외되고 오히려 학부생보다도 더 약자인 대학원생들의 고민을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이번 기획기사는 지난 학기의 의도를 이어받아 지난 기사에서 다뤄졌던 항목들을 4회에 걸쳐 더 심층적으로 밝히려 시도하고있다. 그러나 기사의 내용을 보면, 더 깊게 들어가기 보다는 지난 학기 기사의 내용을 다시 되돌아보는 인상이 강하며 이 때문에 참신하지 못한 느낌을 줄 수 있다는 점은 고민해보아야 할 것이다. 반면 「타자를 품은 묘역」이라는 연재기사는 우리에게 있어 ‘타자’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한다는 점에서 좋은 기사라 평가할 수 있다. 타자에 대한 관심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현실에서 역설적으로 타자는 점차 중요해지고 있다. 특히 이번 호는 우리가 마주치는 수많은 타자들 중 가장 적대시될 수 있는 적군들의 묘지에 대해 다룸으로써 더 효과적인 시도였다.

신문에 있어 기획기사 혹은 특집기사는 다른 기사들과 달리 높은 자율성을 가지는 부분이다. 현재 시점에 일어난 일들에 대한 기사들이 아니라는 점에서 기획기사 혹은 특집기사는 많은 제약을 벗어던질 수 있다. 이러한 자유 때문에 주제 선정이나 서술 방향 등으로 신문의 성격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신문이 가지는 품격 또한 이에 큰 영향을 받게 된다. 즉 기획기사 혹은 특집기사에서 무엇을 어떻게 다루는가가 신문의 품격을 결정짓는다고 할 수 있다. 숙고의 과정을 거쳐 앞으로 더 좋은 주제의 기획기사 혹은 특집기사가 나오길 기대한다.

장성빈
철학과·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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