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지킨 민주주의의 외침
피로 지킨 민주주의의 외침
  • 변성엽 기자
  • 승인 2012.09.16 02: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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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연재]타자(他者)를 품은 묘역③

연재 순서
①용미리 추모의 집 ②파주시 적군 묘지 ③망월동 5·18 구묘역 ④비슬산 사형수 묘지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80년 5월 광주에서 이 노래가 울려퍼질 때, 죽음을 각오한 시민들에게 국가란 무엇이었을까. 금남로를 가득 채웠던 민주화를 향한 외침이 완전히 실현되지 못한 채 망월동 일대에 아직도 메아리치고 있다. 광주종합버스터미널에서 518번 버스를 타고 1시간, 5・18 민주국립공원을 지나쳐 조금 더 들어가면 망월동 시립묘지 옆 언덕으로 50여개의 특별한 묘가 드러난다. 민주화를 향한 목마름이 새겨진 망월동 구묘역이다.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구묘역은 5・18 민주항쟁 시 희생된 자들의 시신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처음 조성됐다. 공수부대의 발포로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그들의 주검은 유족들, 또는 유족들을 찾지 못할 경우에는 청소차에 의해 이곳 망월동 구묘역에 묻힌 것이다. 그 당시 상황에서는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르기 힘들었고 심지어 유족들이 알아보지 못할 만큼 훼손된 주검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후에 그들의 정신을 이어가려는 사람들에 의해 이 묘역에 80년대 이후의 민주화 열사들도 안치되면서 망월동 5・18 묘역은 ‘민주성지’가 됐다. 피로 물들었던 5월의 광주를 기억하며 묘역을 지키던 사람들은 묘역의 땅을 매수하려는 군사정권에 굴하지 않고 ‘민주성지’를 오롯이 이어나갔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긴 시간이 지난 현재, 구묘역에는 80년대부터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투쟁한 학생, 노동자들의 무덤만이 남아있다. 시간이 흘러 새롭게 신묘역이 설립되고 그에 따라 5・18 희생자들은 그곳으로 이장됐기 때문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 집권 이후 광주사태로 불리던 5・18은 민주항쟁으로 재평가를 받게 됐다. 이후 5・18 희생자 묘역을 성역화 하는 사업이 추진됐고 그 과정에서 신묘역과 구묘역이 나뉜 것이다. 신묘역은 대규모 추모관이 건립되고 해마다 정치인들이 방문하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구묘역은 처음 조성될 때의 분위기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

구묘역이 간직한 비극의 역사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담양에 세운 비석(사진①)이 묻혀있는 입구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비석은 원래 전 前 대통령이 광주 옆에 있는 담양의 한 민박집을 다녀가면서 세운 기념비였다. 유족들은 광주학살 이후 그 바로 옆, 담양에 비석을 세운 전 前 대통령의 죄책감 없는 태도에 분노해 그 비석을 뽑아와 구묘역에 묻어 놓은 것이다. 묘역을 찾아 온 사람들은 이 비석을 즈려밟음으로써 전 前 대통령에 대한 희생자들의 분노를 상기하고 영령들의 원혼을 조금이나마 달랜다. 비석을 넘어 묘역을 들어서면 비로소 깊이 잠든 열사들이 묻힌 묘역들이 눈에 들어온다.

사진: 신선혜 기자 sunhie4@snu.kr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외치다

50여개의 봉분 사이로 가장 눈에 는 것은 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이한열 열사의 묘지다. 그는 전두환의 신군부에 맞서는 민주화 투쟁의 정점이었던 87년 6월 학생운동 중 희생됐다. 박종철 군의 사망, 4・13 호헌조치 등에 분개하여 학생들은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고 그 과정에서 연세대 학생이었던 이한열 열사가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것이다. 그의 묘지 앞 상자(사진②)에는 그의 민주화에 대한 열정을 기리는 사람들의 편지, 종이학 등이 들어있고 묘지 뒤에는 그를 추모하는 시가 새겨져있다. 또 이곳에는 86년 분신해 사망할 당시 서울대 정치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재호 열사를 비롯해 80년대 희생된 많은 열사들이 잠들어있다.

민주화 운동은 흔히 80년대에 완성된 것이라 생각하지만, 이곳에는 90년대에 민주화를 위한 투쟁에 나섰다 죽은 이들의 무덤도 있다. 학원자주화를 요구하며 거리에 나섰다 백골단의 쇠파이프 난타로 죽은 강경대 열사(당시 명지대 경제학과 3학년)가 대표적이다. 그의 비석에는 ‘진보적 정권교체’라는 문구의 빨간 띠가 둘러져있고 비석 뒤(사진③)에는 ‘학교 다녀오겠읍니다’라는 마지막 글이 새겨져있어 슬픔을 더한다.

권리를 찾기 위한 시민들의 투쟁은 2000년대까지 이어졌다. 이용석 열사는 IMF 이후 전국적으로 확대된 구조조정과 노동의 불안정화로 발생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해 투쟁을 하다 분신한 열사이다. 비정규직 문제에 온 힘을 쓰던 그의 비석 뒤에는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노동조합이 쓴 추모글이 새겨져 그의 희생을 애도한다. 그를 비롯해 구묘역에 안치된 열사들 중 비정규직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투쟁한 이들이 많지만 그들이 외치던 ‘비정규직 철폐’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채 우리 주변에 남아있다.

사진: 신선혜 기자 sunhie4@snu.kr


열사정신을 가슴에 품은 이들

구묘역에 안치된 열사들의 투쟁은 역사 속에 박제된 한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비록 신묘역에 비해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일각에서는 그들의 정신을 잇기 위해 구묘역을 찾고 있다. 5월 18일이나 열사의 기일이면 이곳을 찾아와 열사들에게 참배를 드리고 그들의 묘지를 돌보는 시민단체, 대학생 단체, 노동조합 등이 그들이다. 광주시 망월동 시립묘지 관리자 김영민 주임은 “신묘역이 생기면서 구묘역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거의 없지만 몇몇 단체에서 자발적으로 찾아와 참배를 드리고 묘역을 관리한다”고 말했다.

구묘역에서 만난 이만영(40)씨는 한국의 민주화 열사들을 소개시켜주겠다며 한국을 방문한 일본인들을 데리고 열사들에게 참배를 드리고 있었다. 그는 “이분들의 민주화에 대한 투쟁이 지금도 연장선상에 있다는 느낌이 든다”며 “용산 투쟁과 같이 민주화 열사 분들이 아직까지 계시고 지속적으로 생겨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종종 구묘역에 참배를 드리러 와서 민주화열사들이 흘린 피를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그들의 신념을 되새긴다.

비바람이 세게 부는 탓인지 국기 계양대에 위에 걸려 있어야 할 태극기(사진④)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국민의 편이 되어야 할 대한민국으로부터 버림 받았던 이들, 그들에게 태극기는 자랑스럽게 펄럭일 수 없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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