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아탑이라는 말의 기원과 그것이 왜 대학을 가리키게 됐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상아로 만든 탑’이라는 표현은 성경의 아가서 7장 4절에서 성모의 목을 고귀하고 순결한 것으로 묘사하면서 사용되었고, 중세에는 채색 필사본에서 성모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상아탑이 오늘날의 의미로 사용된 최초의 사례는 19세기 프랑스의 문학 비평가 생트 뵈브(Charles Augustin Sainte-Beuve)가 동시대 낭만주의 시인 드 비니(Alfred de Vigny)를 비판한 글에서 등장한다. 생트 뵈브는 사회 참여적 작가 빅토르 위고를 갑옷 입고 싸우는 전사로 비유하는 반면에 드 비니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상아탑으로 물러나고 있다고 비난한다. 이후로 현실을 벗어난 학문 태도나 예술지상주의를 상아탑에 비유해 표현하게 됐고, 특히 영어권에서 상아탑은 부정적인 의미로 대학을 가리키며 많이 사용돼왔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대학의 모습을 상아탑이라고 부르며 비난할 수 있을까? 법인화를 하고 안 하고를 떠나서, 이미 20세기 말 이후 서울대를 비롯한 한국의 대학들은 세계화, 상업화와 더불어 기성 질서에 편입해 국가나 시장이 요구하는 대로 이끌려가며 그 기호에 맞는 연구에 초점을 맞춰 철저하게 현실적으로 변했다. 대학은 이제 학문의 전당이자 현실에서 벗어난 상아탑이 아니며, 독립성을 잃고 외부의 이익들로부터 끊임없이 간섭을 받으며 사회에 포섭된 것이다. 최근 대선을 앞두고 서울대를 포함한 대학 정책이 회자되고 있는 것도 대학의 위치가 변화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문제의 핵심인 서열화라는 것도 결국 학문에서의 서열화가 아니라 사회 구조 내에서의 서열화를 의미한다. 이렇게 대학의 현재 모습은 고귀함이나 순결함과는 거리가 먼, 이익을 추구하며 경쟁하는 사회 집단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바뀐 대학에서 학생들은 세상에 대해 비판적이고 반성적인 존재로서의 지식인이 아니라, 기성 질서에 순응하는 상품화되고 기능적인 지식인이 되고 만다.

사실 한국의 경우 대학을 상아탑이라고 부를만한 적이 없었다. 80년대까지는 부당한 사회에 저항하도록 요구받아왔으며, 이후에는 점차 사회 구조에 편입돼 요구에 맞는 인재를 양성하는 데에만 중점을 맞춰왔다. 그 결과로 양적인 팽창을 통해 세계대학평가 순위에서는 가시적인 향상을 보여줬지만, 실제로 격변하는 시대에서 대학이 사회를 선도하거나 비전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필자가 홍콩에 교환학생을 가서 느꼈던 점 중 하나가 홍콩 학생들은 졸업 후 경력에 대해 걱정하거나 불안해하지 않고, 대학에서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마음껏 누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학생들이 순진하다고도 생각했지만 자유로운 시스템 속에서 세계적인 석학들의 수업을 들으며 큰 꿈을 키워가고 있어 부러움을 느꼈다. 홍콩정부가 기본적으로 대학 교육에 막대한 예산을 지출하고 있기 때문에 홍콩의 모든 대학들은 외부의 간섭을 덜 받으며 대학의 기본적인 가치들을 유지하고 있었다. 덕분에 홍콩 사람들은 대학의 서열에 대해서 거의 생각하지 않고 있으며 모든 대학들이 고르게 세계적인 수준의 대학으로 인정받고 있다.

현재 한국에서 대학 정책을 둘러싼 여러 문제들이 발생하는 것은 대학의 기본적인 역할에 대한 성찰이 근본적으로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대학이 고등 교육기관으로서 국민들의 삶을 질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해 사회의 이익에 휘둘리지 않는 상아탑으로 변해야 한다. 대선을 앞둔 최근의 논의들이 대학이 추구해야할 가치를 재고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김륜용
고고미술사학과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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