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수) 베네수엘라의 제61-64대 대통령 우고 차베스(Hugo Rafael Chavez Frias)가 오랜 암 투병 끝에 숨졌다. 베네수엘라의 저소득 빈민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받은 반면 중산층 및 우파 세력들에게 혹평을 받은 그가 논쟁적인 인물이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미국의 언론지 및 국내 주요 언론사들은 차베스의 4선 독재, 언론 탄압, 오일 머니의 남용 등을 들며 ‘좌파 포퓰리스트’, ‘독재자’ 등의 부정적인 평가를 거듭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세계에 남긴 의미 역시 상당하다. 『대학신문』은 부정적인 여론 가운데 차베스가 우리에게 남긴 의의들을 되돌아봤다.

삽화: 강동석 기자 tbag@snu.kr

◇사회주의의 새로운 실험=차베스가 추구한 ‘21세기 사회주의’의 이행 과정에서 드러난 독특함은 사회주의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줬다. 21세기 사회주의는 기존의 자본주의의 사유재산제나 시장경제를 완전히 바꾸지 않으면서 토지 몰수나 재분배, 사회적 기업 장려 등 사회주의적 정책을 채택하는 형태의 경제 이념이다. 차베스는 2005년 브라질의 포르투알레그레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에서 베네수엘라의 기존 경제 이념인 자본주의로부터 벗어나 21세기 사회주의로 나아가겠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이후 이 개혁은 2005년의 빈민층에 대한 토지 분배와 고정 환율제 채택, 2006년의 석유 자원의 국유화 선언, 2007년의 전기 및 통신 산업의 국유화 등의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났다.

21세기 사회주의가 보여준 두드러지는 특징은 생산과 경영 활동에서 노동자의 주권을 대폭 확대했다는 것이다. 이는 노동자를 생산 활동으로부터 소외시킨 구소련식 사회주의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구소련식 사회주의는 자본가의 사적 재산을 없애는 성과는 얻었지만 이 재산을 노동자에게 돌려주지는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는 국가 소유의 재산을 통해 생산활동을 이어가며 생산 수단으로부터 또다시 유리돼야 했다.

현재 21세기 사회주의는 생산 활동에서 노동자가 자신의 생산 활동에 직접 관여하도록 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안을 구현하고 있다. 일차적인 것은 기존 사기업에서의 노동자의 경영 참여를 확대하는 것이다. 2007년 추진된 ‘공장 속으로(Fabrica Adentro)’라는 공동 경영 프로젝트는 일반 기업에서 노동자들이 기업 경영에 참여할 때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으며, 이 결과 프로젝트에 참여한 595개의 일반 기업 중 120여개의 기업이 실제 공동 경영 기업으로 발전했다. 또 새로이 창업하는 기업의 경우 좀 더 전면적인 공동 경영 방식인 협동조합 방식을 장려하고 있다. 차베스 집권 초기 800여개에 불과했던 베네수엘라의 협동조합은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15만3천개로 불어났으며, 총 150만명의 국민이 참여하고 있다. 협동조합적인 사업 형태는 기존의 자본주의적 형태를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

21세기 사회주의가 보여준 또다른 특징은 기존 사회주의에서 나타난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는 것이다. 기존 사회주의 모델의 하나인 사회민주주의의 경우 대의민주주의를 채택했기 때문에 완전한 진보성을 유지할 수 없는 현상이 나타났다. 사회주의 정당이 자본주의 정당과 경쟁해 표를 얻으려면 많은 경우 결국 기존 체제에 순응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에 21세기 사회주의는 직접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대중운동을 중시해 아래로부터의 진보성을 유지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대표적인 예는 지역 주민들의 밀착된 자치조직 ‘주민평의회’다. 주민평의회는 동네 주민들이 모여 어려운 일을 함께 해결하는 ‘동네 평의회’ 개념에 기반해 해당 지역의 모든 의제를 논의하고 결정하는 기관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어떤 자치 권력보다 강한 자치권을 가지고 있다. 2006년 관련 법안이 발표된 후 불과 6개월여 만에 전국적으로 2만 2000여 개가 만들어졌으며, 수백만명의 국민이 생활 단위에서 실제로 필요한 정책을 피력하며 능동적으로 자치를 실현하고 있다

◇빈민의 생활향상에 대한 확고한 철학=차베스에 대한 평가 중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은 빈민에 대해 그가 보여준 확고한 철학과 열정이다. 차베스가 집권하기 전 베네수엘라는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불릴 정도로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었다. 신자유주의의 본격적 시작으로 인해 국가는 인플레와 외채 위기에 시달렸고, 사회는 부정부패와 양극화, 가난한 민중의 배제로 고통을 호소했다.

이 때 1998년 당선된 차베스는 빈곤 퇴치에 대한 명확한 철학에 기반해 ‘미션(Mission)’이라고 불리는 방대한 양의 사회복지 프로그램들을 계획하고 실행해 나갔다. 이 프로그램들은 열악한 상태에 놓인 베네수엘라의 극빈민들에게 순회 의료 서비스를, 빈민층 편부모 가정에게 무상 육아 서비스를 제공하고, 시장 가격보다 훨씬 저렴하게 생활 필수품을 제공하는 등의 다양하고 구체적인 역할을 했다. 그 결과 베네수엘라의 빈곤율은 1998년 50.4%에서 2009년 28.5%로 떨어졌으며 취임 초 천명당 20.3명이던 영아사망률은 2011년 12.9명 꼴로 낮아졌고, 같은 기간 인구 1만명당 의사 수는 3배 이상 늘어났다.

삽화: 최지수 기자 orgol222@snu.kr

특히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것은 교육 프로그램이다. 두 차례에 걸친 ‘미션 로빈슨’과 같은 교육프로그램은 수백 명의 쿠바인 전문가들을 투입해 매년 100만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문맹 퇴치 교육을 진행했고, 2003년 한 해 동안 62만 9천 명에 이르는 사람들에게 기초교육과정 수준의 교육을 제공했다. ‘미션 수크레’와 같은 고등교육 프로그램은 상류층의 사교클럽을 ‘볼라바리안 대학’이라는 민중 대학으로 개조했고, 강사들을 빈민가로 파견해 노천에서도 무상 고등교육을 제공했다. 그 결과 베네수엘라는 2005년 남미에서 처음으로 문맹률 0%를 달성했고 집권 초기 50%선을 넘나든 실업률은 2011년 32%로 낮아졌다.

차베스는 이같은 정책을 통해 직접적인 삶의 변화를 느낀 빈민들에게 전폭적이고 열성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를 가리켜 사람들은 포퓰리즘 논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인본주의적 신념의 결과라고 평가한다. 룰라 다 실바(Luiz Inacio Lula da Silva) 전 브라질 대통령은 7일 「뉴욕타임스」에 낸 기고에서 “차베스의 중남미 통합에 대한 열정과 빈민에 대한 사랑에 대해서는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할 것”이라며 “그의 철학과 신념은 향후 대학, 정당, 보다 평등한 권력배분과 사회정의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이야기될 것”이라 평했다.

22일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씨는 「시사IN」 기고를 통해 “차베스의 통치에 독재적인 요소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의 관심은 철두철미 가난한 사람들의 인간다운 삶의 회복에 있었다”며 “그의 독재는 인간의 삶의 질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던 박정희의 그것과는 전혀 질이 다른 것이었다”고 평하기도 했다

◇석유의 ‘저주’를 ‘축복’으로?=차베스가 자본주의 진영으로부터 받는 주요 비판은 풍부한 석유 자원을 통해 경제발전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베네수엘라의 국가 수출의 90% 가량이 석유이며, 차베스 집권 동안 별다른 기반 산업을 이룩하지 못했다. 2011년 베네수엘라의 인플레율은 27%대에 달했으며, 통화는 2006년 달러 대비 30%나 가치가 떨어졌다. 이에 자본주의 진영이 흔히 차베스와 비교 대상으로 삼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를 고수해 모범적인 경제 성장을 이룩한 이웃 나라 브라질의 룰라 다 실바 대통령이다. 룰라는 베네수엘라와 달리 임기 동안 산업 진흥과 기업 육성을 통해 일자리를 늘려 빈곤층을 줄이는 중도 좌파 노선을 추구했고, 그 결과 브라질은 브릭스로 불리는 신흥 경제강국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경제학자들은 브라질과 달리 석유 수출을 주 수입원으로 삼는 베네수엘라와 같은 나라는 기반 산업을 이룩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말한다. 석유 수출국들은 석유로 벌어들인 외화 때문에 자국의 통화가 크게 평가절상되어 있는 상태다. 통화 가치가 높기 때문에 제조업 등의 수출이 크게 저하되고 이는 경제성장을 심각하게 가로막는다. 소위 말하는 ‘석유의 저주’인 셈이다.

이뿐만 아니라 석유 수출국들의 경제 성장을 가로막는 또다른 ‘석유의 저주’는 사회 불평등이다. 하버드 대학교의 대니 로드릭(Dani Rodrik) 교수 등 많은 연구자들은 재산권의 보장, 정부의 행정 능력, 무엇보다도 사회적 불평등과 같은 비물리적 요인들이 경제성장에 가장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이들에 따르면 석유가 풍부한 나라에서는 사회적 불평등이 극도로 심화된 형태로 나타난다. 석유의 이윤을 장악한 특권 집단이 사회 전체의 특권을 장악하기 때문이다. 이는 경제 성장에 직접적인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일례로 세계 6위의 석유수출대국인 나이지리아와 같은 나라에서는 1970년대 유전이 발견된 후 석유 개발권을 놓고 갈등이 시작됐다. 나이지리아의 내전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사회 불안으로 나이지리아의 1인당 국민소득은 1970년대 이전에 비해 2/3 수준으로 줄었다.

2006년 출간된 책 『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의 공동저자들은 이 사실을 지적하며 차베스가 석유를 기반 산업에 투자하지 않고 사회복지에 사용한 것이 단순히 비합리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베네수엘라의 경우 수익성이 지극히 낮은 제조업 등을 육성하는 것보다는 더 심각한 문제인 사회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석유로부터 발생하는 특권을 다수가 공동으로 소유하고 그 이익을 사회에 투명하고 평등하게 사용할 때 저주는 축복이 될 수 있다”며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는 이 연금술은 차베스와 베네수엘라 민중들의 기득권 세력에 맞선 싸움, 자생적 성장과 같은 새로운 경제모델의 과감한 실험으로 현실이 되고 있다”고 밝혔다.

루이스 푸엔마요르 토로(Luis Fuenmayor Toro) 베네수엘라 센트랄대 교수는 AFP 통신에 “차베스의 정책에는 실수와 비효율도 있었지만 그는 베네수엘라 사회에 되돌릴 수 없는 긍정적 변화를 줬다”고 평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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