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규희 시간강사
(고고미술사학과)
지난 겨울에 한 스타 강사가 TV 프로그램에서 학생들에게 꿈에 대해 열정적으로 강의하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그 강사는 꿈은 명사(名詞)라고 하였다. 의사, 기업인, 방송인, 연주가 등과 같은. 그리고 그 꿈의 성취 여부는 그 명사가 되기 위해 싫지만 해야만 되는 것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였다.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 학생들은 마음 속으로 그 무엇이 되겠다고 결의를 다지는 듯한 표정이었다.

과연 꿈은 명사일까? 같은 명사를 향해 서로 경쟁하며 남들처럼 공부하고 생각하고 준비해야만 하는 것이 꿈을 이루는 과정일까? 목표한 그 명사의 꿈을 이루지 못한 이들은 그렇다면 실패한 사람들일까? 그 꿈을 이룬다 하더라도 그 다음은? 그 뒤에 그들은 또 어떤 꿈을 꿀 것인가?

우리는 그 명사의 꿈을 일찍 이루어낸 이들이 탐욕과 방황 속에서 이 사회에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준 경우를 많이 보아 왔다. 우리가 그들에게 실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에게서 이미 의미 있는 꿈을 지속적으로 꾸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에게 꿈은 명사였기에 그 명사의 꿈을 이룬 순간 그들은 꿈을 놓아버렸고, 그 허전함을 다른 것들로 채우려고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꿈처럼 보이는 그 명사들은 실상은 우리가 추구한 것들이 아닐 수 있다. 세상의 필요에 의해 구분되어진 것들일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소비재처럼 그 명사들로 쓰이기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존재의 의미는 훨씬 더 본질적인 것이라고 믿는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 그것을 찾아 때로는 고통스럽게 애쓰며 일평생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가는 과정이 내 꿈을 찾고 추구해가는 과정이 아닐까?

누구에게나 삶은 단 한번 주어진 너무나 소중한 여정이다. 그리고 그 여정의 모습은 우리의 생김새가 다 다르듯 같은 모양일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스타일의 삶을 살 것인지, 기로에 설 때 어떤 선택을 하며 살 것인지에 따라 우리는 각자의 길을 걷는 다른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남을 격려하는(encouraging), 남에게 영감을 주는(inspiring), 정의로운(righteous) 등과 같은 각기 다른 형용사의 꿈들을 꾸면 어떨까?

 

이런 꿈은 누구를 만나며, 무엇에 가치를 두고 어떤 대가를 지불할지와 같은 우리의 일상에서 매순간 순간 내리게 되는 작은 결단까지도 꿈에 맞춰 고민하게 만들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각자가 추구하는 각양각색의 꿈에 한 발자국 더 가까워지며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꿈은 무엇이 되느냐보다 어떤 사람이 되느냐일 것이다. 그렇다면 꿈은 형용사가 아닐까?

긴 겨울도 지나고 이제 관악캠퍼스에는 설레는 봄기운이 화사하게 피어나고 있다. 이 봄의 향기는 나에게 강의실에서 새롭게 만나는 학생들에 대한 기대감에 새학기의 설렘을 더한다. 학생들을 대하며 내가 갖게 되는 꿈은 무엇일까? 본질이 아닌 지식들로부터 학생들의 생각을 자유롭게 해주는 꿈, 학생들의 문화적, 정서적 허기를 공감하며 채워가는 꿈, 다르게 생각하며 겸손하게 진리를 탐구하는 즐거움을 함께 나누는 꿈, 그리하여 강의실을 나설 때 학생들과 내가 진리가 주는 기쁨에 충만하게 되는 꿈. 오늘도 나는 이런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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