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영조(17241776)와 정조(17761800) 시대에 독일에서 살았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康德, 1724.4.221804.2.12) 서거 200주년이라 하여 금년에 세계 여러 곳에서 그를 추념하는 행사들이 열리고 있다. 한국에서도 그러한 성격의 학술대회가 몇몇 개최되고 있는데, 그에는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본다.

칸트는 이른바 그의 3비판서인 『순수이성비판』(1781), 『실천이성비판』(1788), 『판단력비판』(1790) 뿐만 아니라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1793), 『영구평화론』(1795),『윤리형이상학』(1797) 등을 통하여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다. 그것은 그의 사상이 한국에서도 많이 연구되었고, 또한 그만큼 한국 사회 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1905년경 서양철학에 대한 최초의 소개서로 이정직(1841-1910)의 『강씨[칸트]철학설대약』이 쓰여진 이래로 지난 100년간 칸트사상은 한국 철학계에서 가장 많은 논저의 대상이었는 바, 전공 박사만도 102명(국내대학 61명, 국외대학 41명)이고, 전공 석사는 308명이나 된다. 이렇게 된 데는 칸트철학이 지닌 근대서양철학의 대표성 외에도, 칸트철학이 가지고 있는 한국인의 사고방식과의 친근성과 칸트철학의 한국어로의 높은 이해 가능성이 큰 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100년간 한국 철학에서 가장 많이 연구돼

 

최근에는 한국사회의 문제에 칸트의 철학 적용하기도

 

 

 

한국인들이 칸트의 자발적 인간 주체성ㆍ인격ㆍ윤리ㆍ시민사회ㆍ만민 평등ㆍ국제 평화 사상에서 상당한 친화성을 느꼈음은 이미 한용운(1879~1944)의 『조선불교유신론』(1910), 전병훈(1860경~?)의 『정신철학통편』(1920), 최현배(18941970)의 『조선민족갱생의 도』(1930) 등을 통해서도 잘 드러났다.

 

  철학 사상은 자연 언어로 표현되는 만큼 해석 가능성이 풍부한 이면에 모호함이 없지 않고, 그 때문에 그것이 외국어로 번역 될 때는 난해함이 더욱 커져 경우에 따라서는 오해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칸트철학 언어는 한국어로 이해되는 데 거의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느 경우에는 오히려 원 저술어인 독일어로보다도 더 잘 설명된다. 순전히 한국에서 독일어를 공부해 최초로 칸트 원저를 한국어로 번역한 박종홍(1903~1976)과 최재희(1914~1984)의 연구서들은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이것은 한국 문화 속에서 칸트철학이 잘 이해되는 수준을 넘어서 재생산적인 소재가 될 수 있음을 뜻한다.

 

  칸트철학에 대한 한국 학계의 연구과정은 자연적 수용기(1905∼1944) → 능동적 수용기(1945∼1984) → 심화 연구기(1985∼1999) → 재생산적 연구기(2000∼) 등 4단계로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최근에는 그의 철학에서 실마리를 얻어 한국사회의 철학적 문제들에 응답해 보려는 시도들이 일고 있어 그 성과가 크게 주목된다. ‘보은’을 중시하는 유교ㆍ불교적 윤리에 대치해서 칸트의 인격주의적 ‘의무’ 윤리를 재구성해 확산하고자하는 시도라든지, 칸트의 이성비판 정신을 살려 감성과 지성 그리고 이성, 이념간의 역할 분담과 균제(均齊)에 기반한 ‘합리성’ 개념의 창출 시도 등은 그 좋은 예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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