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로서의 질병』을 쓴 수잔 손택은 “질병은 질병이며, 치료해야 할 그 무엇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아픈 사람은 치료받아야 할 사람이지 ‘쑥덕거림’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프지 않은 사람들이 아픈 사람을 도마 위에 놓고 쑥덕거리기를 즐긴다는 사실을 에이즈 취재를 통해 다시 깨닫게 됐다. 질병에 대한 부정적인 은유와 이미지는 쑥덕거림을 통해 만들어지고, 아픈 사람의 상한 살을 헤집어 덧나게 만든다.

작년 한해 7만 3,759명이 암으로 인해 사망했으며 이는 전체 사망자 수의 25%가 넘는데 반해, 에이즈로 인한 사망자 수는 작년까지 누적된 수치로 따져도 1,512명 정도다. 암으로 인한 사망과 에이즈로 인한 사망 모두 환자 가족의 억장을 무너뜨리는 비극적 사건이다. 하지만 주위에서 어떤 사람이 암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기는 쉬워도 에이즈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기는 어렵다. 에이즈 사망자가 암 사망자에 비해 적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에이즈 환자 가족이 환자의 죽음을 쉬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드라마에서 청순가련한 여주인공이 혈액암으로 투병하다 세상을 떠날 때 전 국민이 그녀의 죽음을 지켜보며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19세기만 해도 암 환자는 문학작품이나 공연예술의 주인공이 될 수 없었다. 19세기에는 암이 자신의 감정을 억압한 응분의 대가로 여겨졌기 때문이다.성적인 환상이나 폭력의 충동을 억압할 경우 암이 발병한다는 대중들의 상상을 확대 재생산하는 데 앞장선 집단은 바로 언론이었다. 암은 비전염성 질병임에도 불구하고 언론에 의해 부정적인 은유와 이미지가 덧씌워지며, 환자들은 질병 자체의 고통과 함께 타인의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이중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전염병은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다. 그래서 그런지 에이즈에 덧씌워진 은유와 이미지는 암보다 끈질기고, 지독하고, 자극적이다. 한국에서 에이즈 감염인은 단순히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것뿐만 아니라, 비감염인의 공포를 자극하는 기피의 대상으로 여겨지며 사회에서 너무도 쉽게배제 당하고 있다. 에이즈 환자도 이제 암환자처럼 쑥덕거림과 차별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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