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남자친구를 앞에 두고 다그치는 여자처럼, 네가 도대체 뭘 잘못한 건지는 아느냐고 따지고 싶을 때가 있다. 카드사를 비롯해 KT의 개인정보 유출 사태에 대한 기업과 정부 측의 대응만 해도 그렇다. 연이은 개인정보유출 사태에서 알 수 있듯, ‘개인정보’는 더 이상 ‘개인’의 정보가 아니게 되었다. 절대로 추가 유출은 없을 것이라던 금융당국의 발표도 거짓으로 드러났다. 자기보다 자기 개인정보가 더 많이 해외여행을 한 것 같다는 자조에, 이제 6원까지 떨어진 개인정보의 가치가 1원으로까지 떨어지면 아마 해킹이 없어질 것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들린다. 이미 다 털린 개인정보라도 ‘개인’이 알아서 관리해야 할 형편이다.

그나마 이러한 사과는 말뿐이기는 하더라도 양반에 속한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의 증거조작 논란에 대해 국정원은 며칠 전 기습적으로 한밤중에 사과문을 발표했다. ‘우리도 속았다,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는 전형적인 ‘꼬리 자르기식’ 꼼수 사과였다. 갑작스런 사과에 사람들이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아니나 다를까 국정원은 업무처리 과정의 미숙함에 대한 사과였을 뿐 위조에 대한 사과는 아니었음을 다시금 강조했다. 하지만 여전히 미심쩍기는 마찬가지다. ‘국가 최고의 정보기관’이 한낱 민간인에게 속았다는 갑작스런 고백을 ‘자랑스런’ 대한민국 국민으로서(함 모씨의 주장대로라면 병역의무를 치르지 않은 3/4짜리 국민이지만) 어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물론 진실이 밝혀진 이후의 사과라고 더 나은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다. 군 사망 사고의 유가족 어머니에게 성관계를 요구하는 문자를 발송한 군 조사관의 패륜적 행동에 대해, 국방부는 처음에는 사실이 아니라며 공식적으로 부정했다. 이후 드러난 증거들로 사실이 밝혀지고 나서야 국방부는 말을 바꾸어 유감을 표명했다. 하지만 이 사과문에도 유가족 어머니가 제기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군 사망 사고에 대한 민관합동의 외부조사-에 대한 언급은 차치하고라도, 자신들의 뻔뻔한 거짓말에 대해서조차 일언반구가 없었다. 이렇게 헛다리짚은 사과, 앞뒤 구분 없는 사과를 ‘영혼 없는 사과’라 부른다.

심각한 이야기를 벗어난 곳에서도 ‘사과’와 관련한 어떤 대응이 눈길을 끈다. 빗발치는 비난 속에 사과가 아닌 ‘입장’을 밝힌 패기 있는 언론사 ‘디스패치’가 그 주인공이다. 김연아의 열애설을 보도한 디스패치는 명백한 사생활 침해와 자신들의 파파라치 행동을 당당하게 ‘알 권리’라 주장한다. 그들은 열애설을 보도한 날 공교롭게도 국정원 협력자의 자살시도가 있었다는 점 때문에 오해가 있는 것 같다며, 관련 기사를 링크하는 친절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자신들의 기사가 정치적 문제와 관계없다는 항변이기도 하겠지만 이쯤 되면 사과도, 입장표명도 아닌 ‘스포츠 연애 기사나 보는 사람들’을 향한 야유에 가깝다.

일단 사과나 하고 보자고 막 던져지는 사과문들의 홍수 속에 허탈해 질 즈음, 엉뚱한 곳에서 터진 처절한 사과에 정신이 번쩍 뜨인다. “주인 아주머니께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 세 모녀의 죽음이 그것이다. 그들은 신세 한탄이나 사회에 대한 원망, 분노가 아닌 ‘사과’를 마지막으로 남겼다. 그들의 사과는 지금까지 말한 것과는 정반대의 지점에서 사과의 의미를 벗어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그 어떤 사과에도 분노할 수밖에 없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안지영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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