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이 또다시 국보 논란의 중심에 섰다. 작년 10월 단청 박락 현상이 일어나(『대학신문』 2013년 11월 18일자) 세간의 우려를 산 지 4개월 만이다. 지난 6일(목) 복원 당시 목재 공사 총괄 책임을 맡았던 신응수 대목장이 기증받은 자재를 횡령한 의혹으로 경찰 소환을 받는 사태가 벌어졌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한 언론사를 통해 “숭례문을 국보 1호로 유지할지 포기할지에 대해 국민의 뜻을 물어보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나선화 문화재청장의 발언이 보도돼 숭례문 국보 유지를 둘러싼 논란이 다시 점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다른 문화재에 비해 숭례문이 유난히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화마가 숭례문을 덮치기 불과 3년 전 강원 양양의 낙산사 동종(보물 제479호)이 화재로 불타 보물에서 해제될 때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강원봉 교수(경주대 문화재학과)는 “국보에 관행적으로 번호를 매기면서 앞 번호가 더 좋은 것이라는 인상을 줬다”며 숭례문이 국보 ‘1호’라는 점 때문에 일종의 우열이 생겨났다고 지적했다. 국보 관리 체계가 오늘날에 이른 과정을 살펴보고 어떤 논란이 있는지 살펴보자.

 

국보 관리 체계가 걸어온 길

한반도의 문화재에 처음으로 관심을 가진 건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이 아닌 일본이었다. ‘문화재’는 근대에 들어와 생긴 개념으로 자국의 문화를 타자화해서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서양에 일찍 개항한 일본에선 자국의 문화재를 향한 관심이 높아졌다. 이후 1900년대 일본에선 문화적으로 유사한 한국의 고대 건축이나 고미술품을 분석하면 자국의 문화를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인식이 생겨나 세키노 타다시, 타니이 세이니치 등 고고학자들이 한국에 들어왔다. 그들은 1909년부터 1912년까지 4차례에 걸쳐 한반도 내의 역사적 자료와 유적을 조사했다. 이때 정리된 문화재들은 조선총독부의 문화재 정책뿐만 아니라 광복 후 한국이 문화재를 지정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이후 조선총독부는 일본에서 시행하던 ‘국보 보존법’을 참고해 1933년 ‘조선 보물 고적 명승 천연기념물 보존령(이하 보존령)’을 발표하고 200개의 유물을 ‘보물’로 지정했다. 편의상 총독부에서 가까운 행정구역 순으로 보물을 지정했는데, 이는 보물 제1호 ‘경성 남대문’부터 제8호 ̒북한산 신라 진흥왕순수비̓가 모두 서울에 있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일본의 ‘국보보존법’과 달리 가장 높은 등급의 유물을 국보가 아닌 보물로 지정한 것은 한반도의 문화를 폄하하려는 의도를 반영한다.

독립한 후에도 한반도엔 사회적으로 불안한 상태가 지속됐기에 총독부가 만든 문화재 관리법을 대체할 법이 오랫동안 제정되지 못했다. 그러다 ‘보존령’이 폐지되기 10일 전 ‘문화재 보호법(1962)’이 가까스로 통과됐다. 오늘날까지 한국 문화재 관리의 지침이 된 이 법은 당시 상황이 급박했기에 일본의 ‘문화재 보호법(1950)’을 여러 부분 참고해야 했다. 문화재에 번호를 부여하는 방식도 이때 받아들여졌다. 이 법을 근거로 정부는 1955년에 모두 국보로 승격시켰던 보물 중 116개만을 국보로 다시 지정했다.

 

국보를 둘러싼 논란

◇일본이 지정한 국보들=그러나 이 당시 지정된 국보들은 일제의 기준에 근거해 선정한 것이고 별다른 재평가 절차를 거치지 못했다. 20세기 초 한반도의 문화재를 조사했던 일본의 고고학자 세키노 타다시는 약 1,450개의 유물을 연도별로 일람했으며 갑·을·병·정 4등급으로 가치를 평가했다. 조선총독부는 1916년 ‘고적 및 유물보존규칙’을 만들어 보호 대상 유물을 등록했는데 총 193건의 유물 중 약 40%는 세키노가 갑·을로 평가한 것들이다. 또한 1933년 제정된 ‘보존령’에 의해 지정된 419개의 보물도 세키노의 조사 목록에 있던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때 지정된 보물 중 일부가 1961년 ‘문화재보존위원회규정’에 의해 명칭만 국보로 바뀐 것이다.

조선총독부가 보물로 지정한 성문과 유적들엔 일제의 제국주의적인 인식이 담겨있다. 일제는 도시화 계획의 일환으로 서울의 성문을 철거했다. 실제로 1904년 조선군사령관이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숭례문과 흥인문도 파괴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 둘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서울을 함락시키면서 통과했던 전승기념물이라는 이유로 제외됐고 각각 ‘보존령’에 의해 보물 제1, 2호로 등록됐다. 문화유산정책연구소 황평우 소장은 “숭례문이 1916년 세키노의 등록대장에 등재되지 않았음에도 1933년 보물로 지정된 사실은 일본의 침략적인 역사인식과 연관된다”고 설명했다. 북한에 있는 현무문, 칠성문, 보통문, 만수대 등 성문과 유적도 전승기념물이라는 일본의 논리 하에 보물로 등록된 역사가 있다.

◇명확한 해제 기준은 있나=문화재보호법제31조는 문화재로서 가치를 상실하거나 가치 평가를 통해 지정을 해제할 필요가 있을 때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지정을 해제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실제로 1996년엔 국보 274호인 별황자총통이 위조된 것으로 판명돼 문화재위원들이 국보 지위를 해제하고 영구결번시킨 전례도 있다. 그러나 ‘가치 상실’, ‘가치 평가’ 같은 표현에서 볼 수 있듯 조항이 추상적이기 때문에 법을 일관되게 적용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잇따라 국보 해제 논란을 겪은 숭례문이 대표적이다. 문민정부와 참여정부 시절 국보로서 숭례문의 가치를 재평가하자는 주장이 나왔을 때 문화재관리국은 국민여론조사를 벌여 국보 1호를 유지키로 했다. 화재로 석축을 제외하고 70% 이상 불타버렸을 때도 문화재위원회는 ‘목조양식뿐만 아니라 역사적 의미 등 복합적 요소’를 고려한다며 국보 해제설을 일축했다. 하지만 막상 ‘전통 방식’으로 복구한 뒤에도 박락 현상, 기둥 균열 등으로 부실 복원 의혹이 일자 문화재청장이 앞장서 숭례문의 국보 해제를 공론화해야 한다고 입장을 바꿨다. 이는 상황에 따라 문화재보호법에 명시된 ‘가치 상실’의 기준이 다르게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조항 적용의 모호함은 화재로 소실돼 지정문화재에서 해제된 다른 문화재들과 비교하면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전남 쌍봉사 대웅전(보물 제164호)은 1984년 4월 3일 화재를 겪었고 그 해 5월 30일 보물에서 해제됐다. 2년 뒤 복원됐지만 원래의 모습을 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보물 재지정은 무산됐다. 전북 금산사 대적광전(보물 제476호)도 1986년 소실되고 1년 만에 쌍봉사 대웅전과 같은 신세가 됐다. 복원이 완료된 후에도 논란만 많은 숭례문의 상황과는 대조적이다.

◇일련번호는 무엇을 위해=1964년 처음 마련된 ‘문화재 보호법 시행규칙’ 제1조는 지정문화재 대장을 작성할 때 지정번호를 기재하라고 명시했다. 이때 시작된 번호 지정의 전통은 오늘날의 시행규칙 제10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문화재에 일련번호를 부여하는 관행은 90년대 전까지 별다른 논란이 없었다.
일련번호 문제는 문민정부가 역사바로세우기를 내세우면서 불거졌다. 일제에 의해 ‘1호’ 문화재로 지정된 남대문이 시초였다. 이에 국보 1호를 다른 문화재로 교체해야 한다는 의견이 등장했다. 이에 문화재관리국은 국민과 전문가를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벌였고 그 결과 남대문은 숭례문으로 원래 이름을 되찾았을 뿐 국보에서 제명당하진 않았다.

국보 1호 교체를 넘어 일련번호를 없애자는 주장은 숭례문이 전소되고 국보 해제가 논의되면서 본격적으로 나왔다. 국보 1호는 한국의 문화재 전체를 대표하지 않는데 사람들이 ‘1호’라는 번호에 의미를 부여하니 지나치게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강원봉 교수는 “상식적으로 1호라고 하면 상징성이 있다고 느껴질 것”이라며 “순서를 매겨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는 오해가 생기고 있다면 재검토할 여지가 있다”고 설명했다.

문화재 전문가들은 문화재 번호가 우열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문화재보호법 시행규칙에는 순차적으로 문화재 번호를 지정해야 한다는 내용도 없다. 프랑스는 ‘1927년 7월 23일 법’으로 약 3만 개의 등록문화재를 일괄적으로 관리하고 있고 중국도 ‘문물판정기준규칙’에 의해 진귀문물과 일반문물로만 나누고 있다. 이주한 교수(대전대 역사문화학과)는 “문화재에 지정하는 번호는 유동적이다”며 일련번호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논란을 넘어서기 위해

문화재는 제작 연대, 재질, 기법 등 형식적 요소뿐만 아니라 문화, 역사, 사회 상황 등 다양한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기에 그 관리에 있어 언제나 치열한 논의가 있었다. 1996년 문화재위원회는 일제가 지정한 문화재를 재평가해 문화재 22점의 등급과 명칭을 조정했다. 2005년 감사원도 제기한 일련번호 삭제 문제는 숭례문이 불타기 전까지 논의됐다. 1962년 제정된 문화재보호법도 수십 차례 개정되면서 시대 상황에 맞게 끊임없이 변화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문화재와 관련된 쟁점들을 공론화하고 소통할 장을 만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숭례문을 중심으로 국보 논란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것도 전문가들 간, 전문가와 시민들 간 의견이 공유될 기회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주한 교수는 “일련번호를 부여하는 문제는 학계에서도 논의할 기회가 없었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각 주는 매년 공공기관과 주립대학이 나서 ‘문화자원’에 대한 기본 소양과 관심을 적극적으로 독려하는 행사를 열지만 한국에서는 이러한 행사가 일부 지역에서 산발적으로 이뤄지고 있을 뿐이다.

문화재 보호법 제1조는 민족문화를 계승하고 국민의 문화적 향상을 도모하기 위해 문화재를 보호한다는 목적을 밝히고 있다. 이는 문화재가 어느 누구만의 것이 아닌 국민 모두의 것이며 모두가 함께 가꿔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논란에 놓인 문화재를 국보로 남길지 말지는 순전히 우리의 몫이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