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의 자유’는 ‘대학의 자유’(Academic Freedom)를 번역한 것이다. 그러나 언론의 자유(Freedom of Speech)가 언론인만의 권리로 협소하게 이해되는 것과 같이, 학문의 자유 또한 잘못 이해되고 있다. 그래서 대학생, 대학원생, 그리고 대학직원 및 강사들은 학문의 자유를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왜? 자신이 ‘학문’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래 대학의 자유는 교수 뿐만 아니라 학생, 사서, 그리고 직원들에게까지 적용될 수 있는 포괄적인 ‘대학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이 단순한 번역상의 문제일까? 그렇지 않은 것이 우리의 비극 중 하나이다.

 

 

헌법 제22조 1항에는 “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고 하였고, 제31조 4항에는 “…대학의 자율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실제 삶과 맞닿아 있는 하위 법률들(고등교육법, 사립학교법, 교육공무원법 등)에서 학문의 자유에 대한 조항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대학의 운영, 교원의 인사문제 등에 대한 법률에 의하여 최소한의 학문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 상황이다.여기서 보호받는 것은 대학당국과 교수일 뿐 대학생, 대학원생, 그리고 직원 등은 배제되어 있다. 결국 ‘학문의 자유’는 ‘교수의 자유’ 차원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다.

 


학문의 자유는 교수, 학생, 직원을 모두 포괄하는 것

서울대 정년 보장률 100%와 김민수 교수 사건은 진한 역설

 

 

두 가지 근거를 통해서 서울대학교에 대학의 자유가 실현되어야 함을 주장하고자 한다.

첫째, 대학의 자유는 교수에게만 주어진 권리가 아니다. 19세기 초에 독일에서 처음 도입된 이 개념은 교수들의 자유(Lehrfreiheit)와 학생들의 자유(Lernfreiheit)를 함께 부르는 것이었다. 이를 적극적으로 도입한 미국 대학들도 포괄적인 ‘대학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UCLA의 「대학의 자유 선언」에서 ‘대학의 자유’란 “교수, 사서, 학생, 그리고 초청자 등 대학 공동체에서의 지적인 독립성, 자유로운 연구, 그리고 구속받지 않는 의사소통을 억압할 목적의 강압과 금지로부터의 자유”인 것이다.

 

 

둘째, 대학의 자유는 교수 정년 보장제(Tenure)의 근본정신이다. 대학 교수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인 정년보장제의 역사적, 철학적 근원은 학문의 자유를 침해하는 다양한 요인들로부터 교수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서울대학교의 경우, 개교 이래 전임강사로 채용된 신임 교수 중 정년 보장을 받지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한 조사에 의하면 정년 보장 임용률이 100%라고 보고되었다. 반면에 미국 대학의 평균적인 정년 보장 임용률은 50%를 넘지 않는다.

 

 

그러면 한국 대학들에서 학문의 자유는 ‘엄청나게’ 보호받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1998년 김민수 전 미대 교수가 재임용에서 탈락한 것은 서울대가 추구하는 ‘세계 수준의 종합연구대학’으로 한걸음 나아가는 고통에 불과한 것일까?

 

 

이것은 진한 역설이겠지만, 김민수 교수의 복직이야말로 서울대학교가 진정한 ‘대학’으로 거듭나는 과정임엔 틀림없다. 그 고통을 오롯이 김민수 교수 한 개인이 짊어지고 있다는 것이 가슴 저릴 따름이다.

 

 

아직 천막은 본부 앞에 서 있다. 서울대학교는 이번 기회를 통해 ‘대학의 자유’를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이를 제도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대학의 자유, 그리고 대학인의 자유는 대학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이재성

사회대 박사과정ㆍ정치학과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