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 이삿짐을 챙기다 우연히 옛날 사진들을 보게 되었다. 1981년 3월 입학식 때 부모님과 함께 조소과 건물 앞 벤치에서 찍은 사진도 있었다. 그중 한 장의 사진이 눈에 띄었다. 유방봉이라 불리는 곳에 올라가 찍은 사진으로 유방봉은 지금 50동과 83동 사이 길 한가운데에 소나무 한 그루가 있는 곳이다. 1981년 입학했을 때 미대 주위엔 테니스, 축구, 야구장 말고는 건물이 없어 당시 유방봉 위의 소나무는 등굣길에 멀리서도 한눈에 보였다. 사진 속 소나무의 굵기와 지금의 굵기를 비교해 보며 놀란 건 33년 동안 엄청나게 굵어졌다는 것이다. 이제는 제법 장송의 위엄이 느껴진다.

 돌이켜 보면 당시 은사님들의 연세가 지금의 내 나이쯤이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지금은 팔순이 넘으신 은사님 중 한 분이 특히 기억이 난다. 아침 9시쯤 학교에 등교하면 51동과 52동 사이에 주차된 은사님의 하얀 제미니를 매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은사님은 항상 연한 상아색(베이지색이었는지) 작업복 코트를 입으시고 한 손에는 훼라를 들고 수업에 들어오셨다. 4시간 실기수업시간 동안 학생 각자의 작업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주시고 소조 시간에는 어색한 부위를 손수 고쳐주시기도 하셨다. 4시간이 부족했다. 어쩌다 수업시간 외에 찾아뵙고 말씀을 듣게 되면 3, 4시간은 각오해야 했다. 정말 학생들에게 많은 애정을 가지고 계셨던 은사님이셨다. 그러나 학교 다닐 때는 철이 없어서 그런 선생님의 말씀이 잔소리 같아 도망 다니기 일쑤였다.

 작년 가을 선생님께 선생님의 은사님에 대해 여쭤볼 것이 있어 댁으로 찾아뵈었다. 반갑게 맞아주시며 은사님에 대해 설명을 해주시는 선생님의 모습에서 팔순이 넘으셨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4시간을 채우셨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하셨다. “내가 수업시간에 가르치려고 한 것이 뭔지 기억하나?” 약간 당황해 하는 내 모습을 보셨는지 선생님은 금방 답을 주셨다. “은사님이 대학 1학년 때 내게 한마디 하신 말씀이 ‘작가는 혼자 가는 것’이라고 하셨어.”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본인도 젊은 나이에 당황하였다고 하셨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그 말씀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셨다고 한다. “졸업하고 작가생활을 하려면 호평과 혹평 모두를 견뎌야 해! 그게 가장 중요한 거야!” 은사님의 버전인 것이며 그게 답이었다. 이 말씀을 들으며 은사님이 수업시간에 학생들 작품에 대해 왜 칭찬보다는 질책을 하셨는지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30년이 지난 지금 내가 수업을 하고 있다. 내가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것이 무엇일까? 내가 실기수업을 할 때 나는 항상 ‘학생과 나의 관계’에 대해 강조했다. 학생 각자는 커다란 열쇠꾸러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문이 있다. 그는 수많은 열쇠 중 맞는 열쇠 하나를 찾아 그 문을 열고 다음 관문으로 가야 한다. 나의 역할은 학생 스스로 바로 그 열쇠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학생 스스로 열쇠를 찾아 열고 나가야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덕목이 ‘진득함’이다. 그러나 속도를 최우선시하고 멀티태스킹을 요구하는 시대를 살며 진득함은 어찌 보면 어울리지 않는 삶의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우보천리(牛步千里)’라 하지 않았는가? 느릿느릿한 소걸음으로 천 리를 가는 것!

 원로 철학자 박이문 선생님의 모 일간지와의 인터뷰 내용을 되새겨 본다. “우리 각자는 오직 나만이 내가 죽는 날 끝을 내야 하는 소설의 책임자입니다. 어떤 이야기를 써서 어떻게 끝을 맺을까 하는 문제는 각자 자신의 결단에 따라 어떤 주제를 선택해서 실천에 옮기느냐에 달려 있는 거지요. 내 인생의 창작자로서 ‘나’를 긴장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창작자로서 자부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말이다.

박춘호 강사
조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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