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도 일상생활을 할 수 있기 위해, 친구와 함께 버스로 여행을 가기 위해, 가족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600일째 광화문광장 지하도 한 켠을 지켜온 사람들이 있다.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폐지공동행동’(공동행동)은 장애등급제의 폐지를 주장하며 지난 2012년 8월부터 광화문 농성장을 떠난 적이 없었다.

행정 편의적 장애인 정책, 장애등급제

지난달 13일 서울 성동구에 위치한 장애인 임시 거주시설인 자립생활체험홈이 불길에 휩싸였다. 센서가 부착된 방문은 활짝 열려 있었지만 방안에 있던 송국현 씨(53)는 화마를 피할 수 없었다. 송 씨는 언어장애로 구조요청이 불가능했고, 오른쪽 팔과 다리의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해 혼자서는 방을 나오지 못했다. 그는 결국 자신의 침대 위에서 심한 화상을 입었고, 구조 나흘만인 17일 숨졌다. 당시 송 씨는 혼자서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해 활동보조인의 도움이 절실했다. 하지만 활동지원제도는 1, 2급 장애인에게만 신청자격이 주어져 중복장애 3급인 송 씨는 이용 자격이 없었다.

현재 한국의 장애인 정책은 장애등급제에 기초하고 있다. 장애인은 의학적 기준에 따라 1급부터 6급까지의 등급을 부여받고 각 등급별로 차등적인 복지 서비스를 제공받는다. 정부는 제한된 예산을 효율적으로 집행하고, 중증장애인을 우선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장애등급제를 도입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장애등급제는 도리어 복지 사각지대를 확대시킨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지난달 30일 서울 고속버스터미널 광장에서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420공투단)이 주최한 ‘장애인 이동권 보장 촉구 및 장애등급제 희생자 고(故) 송국현 동지 3차 추모결의대회’(추모대회)에 참가한 장애인들은 한목소리로 장애등급제의 폐지를 주장했다.

장애등급제는 의학적 기준만으로 장애인을 분류해 장애인 개개인의 필요를 무시하고 있다. 장애등급이 서비스 제공을 결정하는 절대적 기준으로 활용되면서 등급이 같으면 동일한 서비스를 필요로 한다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전주에서 남편과 16개월 된 딸을 데리고 현장을 찾은 장미경 씨(30)는 “장애인마다 개별 특성과 장애 유형이 달라 일률적으로 등급을 매기기 어렵다”며 “특히 활동보조인제도는 장애인의 생활 환경과 욕구에 따라 필요가 결정되는 것인데 복지부는 장애등급만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편 장애인의 신체에 등급을 매기는 것을 문제 삼는 목소리도 있었다. 경기도 화성동부자립생활센터 강북례 소장은 “활동지원제도를 비롯한 장애인 복지는 장애인의 당연한 권리인데도 짐승에나 부여하는 등급제를 적용해 복지를 제공하는 것에 모욕감을 느낄 때가 많다”고 토로했다.

최근 정부는 이러한 비판을 의식한 듯 장애등급제를 폐지하고 2016년부터 종합판정도구를 적용하기로 했다. 종합판정도구는 등급제를 대체할 새로운 복지서비스 제공 기준으로 ‘장애종합판정체계 개편 추진단’이 개발해 2015년 시범사업을 실시할 예정이다. 이날 정부는 등급제 폐지에 따라 활동지원제도의 신청자격도 단계적으로 폐지하기로 확정했다.

그러나 정부안에 대한 장애인 사회의 반응은 싸늘하다. 장애인 단체는 정부의 계획이 등급제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등급의 이름만 변경하는 것일 뿐이며 관련 예산계획조차 마련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공동행동 한명희 집행위원은 “정부안은 현재의 1~3급을 중증으로, 4~6급을 경증으로 재분류하겠다는 것 뿐”이라며 “중증과 경증의 경계에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등급 때문에 필요한 제도를 이용할 수 없는 사각지대에 놓이게 된다”고 정부안을 비판했다.

9년째 제자리인 장애인 이동권 보장 수준

“우리도 승객이다. 승무원은 우리를 태워 달라.”

지난달 30일 열린 추모대회가 끝난 직후 420공투단은 서울 고속버스터미널 승차장에서 고속버스를 이용할 수 없는 장애인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 ‘제2차 장애인차별철폐 희망고속버스 탑승 행사’를 진행했다. 경부선과 영동선 고속버스 승차권 200매를 구입한 장애인들은 열띤 목소리로 “버스 타자”를 외쳤다. 김선득 씨(33)는 “직장 때문에 대구에 사는데 성남 버스터미널을 이용할 수 없어 본가가 있는 경기도 성남에 한 번 올라오기 위해 서울역이나 수원역까지 가서 돌아와야 한다”며 어려움을 털어놨다.

경찰은 대구행 버스 앞에서 장애인들의 이동을 저지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박경석 상임공동대표는 “우리도 일반 승객들처럼 표를 끊고 승차장 내에서 자유롭게 이동할 권리가 있는데 왜 경찰은 길을 막는가”라며 거세게 항의했다. 행사 참가자들은 경찰과 1시간가량 대치했으나 결국 한 명도 버스에 탑승하지 못했다. 최송환 씨(49)는 “고향인 충남 서천까지 고속버스를 타고 가면 참 좋은데 고속버스는 저상버스가 한 대도 없다”며 말끝을 흐렸다. 현재 휠체어 리프트가 설치된 고속버스는 한 대도 없다.

장애인의 이동권은 이미 법적으로 보장돼 있다. 2005년 제정된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이동편의증진법)에 따르면 교통약자는 모든 교통수단, 여객시설 및 도로를 차별 없이 이용할 수 있다. 교통약자는 일상생활에서 이동에 불편을 느끼는 사람으로 장애인도 교통약자에 포함된다.

그러나 이동편의증진법이 제정된 지 9년이 지났지만 장애인의 이동권 보장수준은 제자리다. 관련 법률에 강제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동편의증진법 시행령은 광역버스, 고속·시외버스 등에 이동편의시설을 설치하고 저상버스를 도입할 것을 의무화하고 있다. 그러나 그 기준과 시기가 명시돼 있지 않아 정부가 법을 이행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구체적인 근거가 없다. 전장연 남병준 정책실장은 “이동편의증진법상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는 5년마다 교통약자이동편의증진계획을 마련하도록 돼 있지만 계획 이행률은 저조하다”며 “저상버스의 경우 올해 계획상으로는 1,847대가 도입돼야 하나 예산은 800대 수준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 지난달 30일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에서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의 회원이 고속버스에 탑승을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이날 고속버스에 탑승한 장애인은 한 명도 없었다.
사진: 김희엽 기자 hyukim416@snu.kr

장애인의 필요를 반영한 복지가 되려면

장애등급제는 현재 한국과 일본에서만 시행되고 있는 제도다. 실제로 미국과 서부 유럽에서는 전문화된 인성·심리검사 및 직업평가 등을 실시해 장애인 개인의 특성과 생활 환경에 맞는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에 장애인 사회와 전문가들은 한국에서도 장애등급제의 폐지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조흥식 교수(사회복지학과)는 “장애등급제를 폐지하고 장애인의 필요에 따른 복지가 이뤄질 수 있도록 전담 사회복지사의 전문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덧붙여 조 교수는 한국의 장애인 정책은 궁극적으로 장애인의 자활을 지향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장애인의 자활을 위해서는 직업훈련을 포함한 직업재활을 제공해야 하고, 자립생활센터나 그룹홈과 같은 장애인 거주시설을 질적, 양적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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