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사는 세상] 저술가 유시민

사람들은 그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적 경호실장’ 혹은 ‘최전방 공격수’로 기억한다. 정계에 입문한 지 10년, 유시민은 공격수에 걸맞은 날카로운 발언과 여러 정당을 휘젓고 다니는 행보로 진보와 보수 모두에게 요주의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지난해 초 돌연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자신의 서재로 돌아갔다. 저술활동에만 전념하겠다는 것이다.

사실 유시민은 정치인이기 이전에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와 『대한민국 개조론』, 『국가란 무엇인가』에서 은퇴와 함께 출간된 『어떻게 살 것인가』에 이르기까지 열 권이 넘는 저서에서 역사, 법, 정치, 사회를 넘나들며 자신만의 시각과 특유의 글솜씨를 자랑했다. ‘정치인 유시민’과는 다른 ‘지식 소매상 유시민’의 모습이었다.

그라운드에서 은퇴한 공격수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지난 15일(목) 아침, 유시민이 서울대 관악캠퍼스의 한 카페를 찾아왔다. “지금은 삶이 좀 자연스러워졌다고나 할까 아니면 편안해졌다고나 할까.” 점퍼에 모자를 눌러쓴 차림의 그는 커피 잔을 들고 소탈하게 웃었다. 양복과 넥타이를 벗어 던지고 자신에게 맞는 옷을 찾은 듯했다.

▲지난 15일(목) 유시민이 서울대 관악캠퍼스의 한 카페에 찾아왔다. 정계를 은퇴하고 저술 활동에 전념 중인 그에게서 자유주의자의 삶의 원칙에 대해 들어봤다.
인터뷰: 송승환 사회부장 songseung88@snu.kr
사진: 전근우 기자 aspara@snu.kr


나는 근본적 자유주의자

“나는 스스로를 래디컬(radical)한 리버럴리스트(liberalist)라고 생각해요.” 유시민은 지금껏 자신의 정체성을 자유주의자로 정의해왔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라는 그의 주장은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한쪽에서는 좌파로, 다른 쪽에서는 시장주의자로 불리며 외면받았다.

그런 그가 자신의 변호인으로 내세우는 사람은 영국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이다. 밀은 『자유론』에서 ‘사회와 국가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제한하는 것이 정당한가’를 물었고, ‘다른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않는 한 누구라도 개인의 선택에 간섭하거나 제약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답했다. 변호인 밀이 제시한 자유의 원리는 의뢰인 유시민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준다. “개인의 삶, 개인과 타인, 개인과 국가와의 관계를 살필 때 제일 중요하게 보는 것이 이 자유의 원리라는 점에서 제 자신을 자유주의자라고 하는 겁니다.”

그는 여전히 자유의 원리가 지켜지지 못하고 있는 시대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의 화살은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했던 교사들을 징계하려는 교육부를 겨눴다. 지난 13일, 43명의 교사들은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청와대 게시판에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는 글을 게시했다. “교사들의 의사 표현이 타인의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했는가? 아니라고 봐요. 의사 표시 그 자체는 타인의 자유를 어떤 방식으로도 침해하지 않아요.” 자유의 원리에 비추어 볼 때 교육부의 징계는 시민의 자유를 침해하는 부당한 공권력 행사라는 것이다. “부당하게 자신의 자유를 침해당한 사람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정당해요. 국가가 폭력적인 방법으로 나의 자유를 억압할 때도 마찬가지죠. 국가의 부당한 억압에 저항할 수 있는 권리가 바로 주권재민의 원리입니다.”

이처럼 보편적인 자유의 원칙을 주장한 그는 왜 어느 쪽에서도 지지받지 못했을까. “그건 사람들이 자유를 이해하는 방식이 달라서 그래요.” 그가 생각하는 자유주의는 건강한 개인주의에 기반을 둔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식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그에 맞게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개인주의가 자유주의의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선 건강한 개인주의 철학이 사회의 지배적인 생활방식으로 자리 잡은 적이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우리 사회는 좌든 우든 공통적으로 개인주의 철학이나 자유주의 사상의 기초가 굉장히 허약한 사회에요. 자유를 이야기하면 한쪽에서는 국가를 부정하는 것 같이 보고, 다른 쪽은 아주 천박한 쁘띠 부르주아로 보는 거죠.”

자유주의자 유시민이 중시하는 단 하나의 원칙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다. “만약 대한민국 국민들이 투표해서 미국의 52번째 주로 들어가자 결정하면, 난 가능하다고 봐요.” 개인의 선택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지만 그는 여전히 개인들이 선택해 내린 결정은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유로운 선택에는 역사적 맥락, 사회정치적 이해관계, 그리고 문화적 관련성이 모두 반영돼요. 그것 말고 다른 원리가 뭐가 있을까요?” 그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강조하는 까닭은 자유주의가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는 보편타당한 원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철학의 장점은 완전하진 않지만 한 개인의 삶에서 시작해 지구촌 전체의 일까지를 하나의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는 거에요.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 공동체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거죠.”

근본적 자유주의자이지만 극단적 자유주의자는 아니다

그는 자유를 가장 중시하지만 자유만 중시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가치는 안 중요하나? 그건 아니에요. 자유가 중요하다고 믿지만 다른 가치를 자신의 발아래 종속시키는 절대적 지위를 갖고 있다고 보진 않아요.” 그에게 자유는 정의, 평등, 평화, 환경과 같은 가치를 추구하기 위한 기초에 해당한다. “어떤 가치나 이념을 절대화하면 그건 리버태리어니즘(libertarianism) 혹은 파시즘(fascism)이 돼요. 나는 그게 약간 무섭거든.” 그는 여기서 자유지상주의자와 자신을 구분하는 선을 그었다. “자유지상주의의 문제는 다른 방식을 인정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나 자유의 원리를 무제한적으로 적용하려는 데 있어요.”

특정 가치의 절대화를 경계하는 그는 삶에서도 극단을 지양한다. 그가 볼 때 사람들은 세상의 어리석음을 ‘바꾸고 바로잡는 것’과 어리석은 세상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 모두를 저마다의 비율로 혼합하며 살아간다. “어쩔 수 없는 세상의 어리석음과 더불어 살아가지 못하면 불행하고, 세상을 고치려고 조금도 노력하지 않는 삶은 굉장히 비속해요.”

어리석은 세상에서 극단으로 치닫는 삶은 곳곳에서 눈에 띈다. 그가 보기에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는 우리 사회의 극단 중 하나다. 올해도 일베 회원들은 5·18 민주화 운동을 ‘폭동’이라 부르고 유가족을 모욕해 물의를 빚었다. “일베는 개인의 내면에 있는 온갖 부정적 감정이 외화된 형태를 보여줘요. 내면의 어떤 감정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사람들이 거기서 놀고 있는 거죠.” 누구든 마음속엔 약자를 능욕하고 싶어 하는 심리, 공격적 충동, 열등의식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들이 극단적으로 한 데 모여 있는 양상이 일베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일베를 비정상으로 볼 것은 아니라고 했다. “우리 모두가 일베에요, 일정 부분은. 저들을 반면교사 삼아 내 삶의 좌표를 정하면 될 뿐이에요.”

이번 지방선거를 앞두고 쟁점이 되고 있는 복지문제도 어느 한 극단일 수 있다.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기본소득과 생활임금 보장의 실현 가능성을 묻자 그는 “난 개인적으로 회의적”이라고 답했다. “기본소득이나 생활임금은 세상의 어리석음과 더불어 살아가려는 생각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 하는 주장이에요.” 기본소득을 지급하기 위한 재원을 확보하려면 조세 부담률을 높여야 한다는 점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다. 이때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부유세의 비중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세금 부담을 지우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의 동의가 필요한데, “종합부동산세도 헌법재판소에 가서 위헌결정을 받았는데 우리 사회가 어떤 부유세를 도입할 수 있을까요? 이 문제를 토론하는 것은 좋다고 봐요. 그런데 내 생전에, 정신이 말짱하고 눈 뜨고 있을 때 기본소득이 실현될 가능성은 제로에요.”

그는 세상의 어리석음을 경계하면서도 현실적인 제약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더 나은 선택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는 그가 자유무역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잘 드러난다. 한국은 6, 70년대 개발독재시대를 거치며 수출산업 중심의 경제성장을 지속해왔고, 현재 수출입 규모는 국내총생산(GDP)과 맞먹는다. 좋든 싫든 한국은 통상국가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65년이 됐어요. 성인이 된 거죠. 개인도 성인이 되고 나선 직업을 바꾸기 쉽지 않아요. 먹고사는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에요.” 한국은 이미 오랫동안 무역업에 종사해 왔기 때문에 선택한 업종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당장 바꿀 수는 없다는 것이다. “결국 이 상황에서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취할 수 있는 장점이 뭔지를 생각하며 살 수밖에 없지 않나요? 역진방지조항 등 독소조항만 없다면 자유무역협정(FTA)도 괜찮다고 봐요.”

보다 ‘리버럴(liberal)’한 사회를 위해

자유주의자 유시민은 역사의 진보를 확신했다. “자유가 확대돼 온 과정이 역사의 진보였다고 생각해요. 한국 역시 온전히 자유로운 국가는 아니지만 빠른 속도로 자유의 확대를 경험해 왔죠.” ‘시집가서 편지질이나 한다’며 교육받지 못하던 딸들은 경제, 정계, 공직을 비롯한 사회 각 영역에 진출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실명인증이 필요한 인터넷 게시판엔 대통령을 설치류나 가금류로 비유한 댓글이 자유롭게 달린다. 누나가 공장에서 일하며 남동생을 공부시키고, 대학 시절 친구들과 찍은 사진과 일기장이 ‘범죄’의 증거가 되던 시절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다.

그러나 자유의 확대는 자유를 갈망하는 것만으로는 얻을 수 없다. 물질적 조건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생활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고, 불합리한 제도가 유지되는 한 자유는 언제든 부당하게 제약될 수 있다. 한편 낡은 사상은 사회 구성원들이 부조리한 질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 “이 세 가지가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옭아매요. 우리는 자유로워지기 위해 세 가지 족쇄로부터 풀려나야 합니다.”

그는 자유로운 삶을 위해선 경쟁력의 확보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경쟁을 안 좋아해도 경쟁력은 있어야 해요. 경제발전 자체가 천박한 게 아닙니다.” 빠르게 진전되고 있는 국제화와 개방화의 흐름 속에서 공동체가 무시당하지 않고 충분한 물질적 부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경쟁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대규모 토목공사나 규제 완화를 통한 부의 창출은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는 낡은 방식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은 여전히 자본주의 발전국가 수준에 머물러 있어요. 산업용 전기요금 할인을 비롯해 기업에 지원하는 돈이 통합재정대비 20%나 돼요. 산업을 육성하는 국가의 기능이 과대합니다.”

자유주의자 유시민이 볼 때 국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생산요소의 투입량을 늘리는 방식은 한계에 도달했다. 전통적인 생산요소로 일컬어지던 노동과 자본에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노동의 투입을 증가시켜 생산량을 늘리는 것은 저출산,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며 어려워졌다. 한편 신자유주의의 흐름은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가져왔고 자본은 더 이상 희소한 생산요소가 아니게 됐다. 새로운 콘텐츠가 있는 곳에 자본이 스스로 찾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 개개인의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진단했다. 앞으로는 생산요소의 양이 아니라 개인이 능력을 발현했을 때 나타나는 기술 수준이 경쟁력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국가는 사회투자를 강화해 개인이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줘야 한다. “복지, 보건, 교육 분야에 지불하는 돈은 소비돼 없어지는 게 아니에요.” 그는 『대한민국 개조론』에서 고아원 아이들이 빈곤에 빠지지 않도록 정책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단순한 시혜가 아니라고 짚었다. 지원을 통해 아이들이 성실하고 유능한 납세자로 자랄 수 있다면 이는 곧 생산적인 사회투자이기 때문이다. “국가기능을 물질에 대한 지원에서 사람에 대한 지원으로 바꿔야 해요. 이는 국민의 정치적 선택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너무 자책하지도, 비속해지지도 말길

그가 요즘 서재에서 집필하는 책은 1959년부터 2014년까지 자신의 삶과 맞닿아있는 한국의 현대사다. “책에 쓰진 않았지만 유신체제 관료집단 중 서울대 출신들이 많은데 그 좋은 머리로 나쁜 짓 정말 많이 했어요. 반면에 민주화 과정에서 감옥에 간 숫자, 목숨을 버린 숫자도 압도적으로 서울대가 많아요.” 세상의 어리석음을 이용해 자신의 욕망을 채우던 사람도, 세상의 어리석음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던 사람도 서울대 출신이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유시민은 학생들에게 당부하고 싶다고 했다. 세상의 어리석음을 놓치지 않으며 너무 자책하지도, 비속해지지도 말고 살아가라는 것이다. “그 좋은 머리, 공부 잘하는 머리가지고 악을 이용해서 자기 욕망을 충족하는 비속한 삶을 살지 마세요. 세상의 어리석음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이를 바로잡기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갔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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