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원 강사
기초교육원

첫 번째 장면. 어느 오후의 지하철 2호선 전동차 안. 모든 승객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누군가 버린 음료수 빈 깡통이 차량 움직임에 따라 또르르 또르르 방향을 바꾸며 굴러다녔다. 나는 깡통을 바라보며 머리가 복잡했다. 시끄럽기도 했고, 누가 밟고 미끄러지기라도 할까봐 걱정이 됐다. 하지만 다가가 깡통을 집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내가 바로 깡통을 버린 사람이라고 오해받을 것만 같았다. 다음 정차역에서 대학생으로 보이는 청년 둘이 탔다. 그 중 하나가 아무렇지도 않게 깡통 앞으로 가더니 냉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몇 정거장 후에 내렸다. 깡통을 손에 든 채. 아마 가까운 쓰레기통에 집어넣었을 것이다. 나는 존경하는 시선으로 그 뒷모습을 배웅했다.

두 번째 장면. 인천행 1호선 지하철 안. 종로를 지나면서 서서히 승객들이 많아졌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계속 올라탔다. 연세가 아주 높거나 건강상태가 나쁜 분이 제발 내 앞에 서지 않으시길 바라면서 나는 곁눈질로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한번 양보했다가는 인천까지 꼬박 서서 가야 할 것이 뻔했다. 전에 어느 할머니께 양보했다가 몇 정거장 후 그 할머니가 내렸지만 다른 할머니가 달려오는 바람에 결국 끝까지 자리를 되찾지 못했던 경험도 생생했다. 이런 나와는 달리 청년들은 거침없이 일어나 “여기 앉으세요!”라며 차례차례 자리를 양보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 만원 지하철에 서 있는 불편을 감수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참으로 위대한 양보’라고 생각했다.

두 장면 모두 내게 부끄러운 기억이다. 아니, 어쩌면 현재의 내 모습을 가장 정확히 드러내는 장면들일지도 모른다. 나는 어쩌다가 신체의 안위를 가장 걱정하는 사람, 먼저 행동하지 않고 남들의 행동만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돼버렸을까.

며칠 전 수업 자료로 읽은 2009년 오바마 대통령의 당선 수락 연설에 ‘자신을 넘어서는 더 큰 무언가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 그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할 자세’라는 구절이 있었다. 정치적 수사와 맥락을 떠나 인상 깊게 다가오는 구절이다. 모두가 자신만 생각하고 산다면 이 세상의 진보는 기대하기 어려울 테니. 세상에 태어나 살다 떠나는 우리 존재가 그저 자기 편히 사는 일에만 매달린다면 너무 허망할 테니.

‘자신을 넘어서는 더 큰 무언가’에는 여러 차원이 존재하리라. 지난 여름 극장가를 휩쓴 영화의 주인공 이순신 장군, 105년 전 10월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21세의 청년 안중근, 끔찍한 박해를 받고 죽임을 당한 지 220년이 지나 시복된 순교자들… 이 분들은 내 소견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차원이다. 시대가 달라졌으니 그런 거라고, 이제는 모두 자기 한 몸 먹고사는 문제에만 골몰하게 됐다고 애써 자위해 보지만 신통치 않다. 누가 뭐래도 지금이 그때보다는 굶지 않고 살아남기 좋은 시대 아닌가. 이런 극단적 차원의 인물들은 그저 ‘넘사벽’이라 돌려 두는 편이 차라리 마음 편하다.

생각하면 내게도 ‘무언가’가 있긴 하다. 매번 강의실에 들어가면서 지난번보다는 더 잘 하려고, 나나 학생들 모두에게 조금 더 의미 있는 시간을 만들려고 고민한다. 지구를 위해 종이컵 안 쓰고 물이며, 전기며, 음식 재료며 알뜰하게 다 쓰려 노력한다. 하지만 이들 소극적 차원의 ‘무언가’에는 적극적인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결국 나는 신체의 안위를 보존하면서 깨작깨작 ‘무언가’를 합네 주장하는 수준이다.
어느 정도 차원의 ‘무언가’를 실천하는 것이 잘 사는 일인지 난 모른다. 역사 속의 극단적 영웅들을 감안하면 아마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그래도 지하철에서 만난 일상의 영웅들을 보면서 부끄러웠던 것을 보면 내 ‘무언가’의 차원이 조금 더 높아져야 하는 모양이다. 방법을 계속 고민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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