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보호색으로 치장한 채 느릿느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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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학신문
  • 승인 2014.11.15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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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에세이] 토마스 만, 『파우스트 박사』

토마스 만(1875-1955)의 작품들 가운데 『성경』의 등장인물이 주인공인 작품이 『요젭과 그의 형제들』이고, 현대사의 파국적 현장에서 완성된 작품이 『파우스트 박사』다. 그의 작품들은 신화적 고전 그리고 독일 역사의 참담한 무대, 그 광대한 스펙트럼에서 전개된다. 『파우스트 박사』는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편 제2장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괴테와 단테, 두 천재의 고답적 영역을 작가가 내딛고 있는 것이다. “작고한 친구의 천부적인 음악적 천재성”을 다루고 있는 화자의 말을 들어보자. “물론 나 같은 사람에게는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 그렇다고 천재성이 발휘되는 영역에 지레 겁을 먹고 물러설 이유도 없고, 또 다정하게 우러러보며 존경심을 가지고 천재의 활동 영역에 대해 허물없이 이야기하거나 다루어서는 안 될 이유도 없다.” 우리 독자들 또한, 화자의 말대로, 천재적 주인공의 활동 영역에 대해 허물없이 다루어서는 안 될 이유도 없을 것이다. 한국의 젊은 독자가 독일의 난해한 『파우스트 박사』 앞에서 지레 겁을 먹고 물러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주인공 레버퀸의 바로 이 천재성이 악마성과 물려 있다는 사실이다. 천재성과 악마성의 상호작용이 소설의 형식적 특징을 결정하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화자의 역할이다. 작품의 예술적 완성도가 그의 역할에 달려있는 셈이다. 소설의 사건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화자가 소설 속의 주요인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문학박사 차이트블롬이 화자의 이름이다. 화자는 “최고의 예술과 학문”에 경도된 인문학자로서 60세의 인물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화자가 독자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2장, 여기까지만 읽은 독자로서는 문제의 ‘파우스트 박사’가 그보다 두 학년 어린 후배 주인공인지 아니면 선배인 화자인지 좀 불확실하게 된다. 그렇다면 악마적인 내용에 맞는 천재적인 형식이야말로 독자가 이 소설에서 터득해야할 개체의 몫으로 보며 독서를 밀고 나갈 필요가 있다. 화자와 함께 독자는 “인문학에 대한 흥미, 인간이 지닌 아름다움 그리고 이성이 지닌 존엄에 대한 생생하고 사랑스러운 감정 사이에 존재하는 신비로운 내적 연관성”을 터득하며, “언어에 대한 열정과 인간에 대한 열정 사이의 긴밀한 정신적 유대”를 체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긴밀한 정신적 유대는 『파우스트 박사』에서는 1인칭 소설과 3인칭 소설의 교차편집에서 확인된다. 3인칭 주인공 레버퀸의 기록을 확보한 1인칭 화자 차이트블롬이 그 정신적 유대를 부각시키고 있다. 16장에서는 레버퀸의 편지를 그리고 25장에서는 레버퀸의 비밀스러운 수기를 1인칭 화자가 공개한다. 전자에서는 주인공이 육체적으로 욕망하는 여자의 정체가 밝혀지고, 후자에서는 주인공이 정신적으로 두려워하는 대상이 등장한다. “헤테라는 날개에 보랏빛과 장밋빛의 짙은 반점이 하나 있을 뿐 그 밖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서, 날아갈 때는 마치 바람에 날리는 꽃가루처럼 보인다.” 3장에서 인용한 이 문장은 16장과 25장의 자료에 연결된다. “그런 종류의 나방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벌거벗은 모양을 하고 짙은 잎사귀의 그늘을 좋아하는 까닭에 ‘헤테라 에스메랄다’라고 불린다.”

1인칭 화자가 들려주는 이야기와 전달방식에 초점을 맞추며 여기까지 말없이 따라온 독자인 필자가 이 대목에서 제기하는 질문이 있다. 주인공이 욕망하는 대상이 헤테라 한 여자에 국한된 것인가? 화자는 제1장에서 미리 답을 준비해놓고 있다. “도대체 이 친구가 누구를 사랑한 적이 있던가? 한때 어떤 여인을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에는 어떤 아이를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질문은 계속된다. 제25장에서 ‘나와 그’의 관계는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파우스트 박사를 모델로 삼고 있지만, 『파우스트 박사』25장에서 독자에게 전달된 기록은 설득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그것은 제44장에 등장하는 아이, ‘에코’처럼 바로 그 괴테의 에코/메아리인 작가, 토마스 만의 고육책이다. 에코는 죽는다. 그렇다면 이 문제의 변증법적 타개책은 무엇인가?

화자만 믿고 따라가는 순종적인 독서를 그만 멈추고 “하계(下界)와의 생산적인 접촉”(2장)을 이제 독자 자신이 시도할 때가 왔다. “미미하나마, 그의 창작활동에 보조역할”을 감행하는 것이다. 만저 쇤베르크의 「달에 홀린 피에로」와 부조니의 「파우스트 박사」 그리고 요르크 횔러의 음악극 「마이스터와 마르가리타」를 듣는 일이다. 또는 화자의 아내 헬레네를 괴테의『파우스트』2부에 등장하는 헬레나와 겹쳐 읽는 것이다. 화자가 자기 이름을 밝히기도 전에 독자에게 알린 사실이 있다. “우리 독일의 역사를 이끌어가는 정신과 요구들이 나의 신념과 일치할 수 없다는 사실이 입증되자 나는 일찌감치 내가 아끼던 교사직을 주저 없이 포기했던 것이다. 나는 그러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독자는 작가에게 “듣기 좋은 말만 하거나 장단을 맞추거나 애교를 떠는” 아이가 아니다. “나[=화자]는 그가 어떤 방식으로든 아이를 어루만져 주거나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다. 다만 아이의 손을 잡고 들판으로 산책 나가기를 즐겼을 뿐이다” 이제 독자도 화자처럼 “나에게 할당된 몫”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끼던 교사직을 주저 없이 포기했던” 그가 용기 있게 던진 말이 있다. “본성상 온갖 악마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에게도 이런 생각이 반드시 합당치 않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런 생각은 내가 대학 졸업시험을 마친 뒤 마음씨 좋은 부모님 덕분에 거의 일 년 반에 걸쳐 이탈리아와 그리스로 수학여행을 다니던 도중 어느 순간부터 줄곧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목적이 정당하다면, 개체의 길은 그가 지나가는 그 어떤 길목에서도 맞다.(dass ein jeder Weg zu rechtem Zwecke auch recht ist in jeder seiner Strecken) 46장으로 마감된 소설 제43장에 나온 격언이다.

▲ 고원 교수
(독어독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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