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청년노동자들의 한국판 블랙기업 운동

▲ 지난 9일 청년유니온은 민주노총과 함께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한국판 블랙기업 운동'을 선포했다. 이들은 앞으로 한국형 블랙기업 지표를 개발하기 위해 연구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사진제공: 청년유니온

“너희들은 쓰레기다! 예외는 있겠지만, 사회생활을 갓 시작한 너희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쓰레기다! 그 이유는 현시점에서 회사에 이익을 가져다주는 놈이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으면서 월급을 축내는 너희들은 나쁜 놈이다. 너희들은 선배 직원들이 벌어 놓은 이익을 가로채는 기생충이다!”
일본의 블랙기업 운동을 소개하며 2013년 번역되어 출간된 책 『블랙기업』에 등장하는 표현이다. 직원이 1천 명에 이르는 도쿄의 한 IT컨설팅 회사에서 입사 첫날을 맞은 신입사원들의 면전에 임원급 상사가 뱉어낸 발언이다.

일본의 기업들은 이런 식으로 젊은 직원들에게 ‘신입사원은 비용 낭비’라는 가치관을 집요하게 주입하고, 그들 스스로 성과 창출이라는 자기 증명의 강박에 시달리게 만든다. 그런 규범을 내면화한 청년들은 스스로를 완전히 파괴할 때까지 자신을 몰아붙인 끝에 기업으로부터 버려진다. 회사로부터 쓸모없는 존재, ‘비용 낭비’로 지목된 직원은 매일 몇 시간씩 계속되는 ‘상담’을 통해 퇴직을 강요받는다. “넌 일하는 게 형편없어.” “인간성이 근본적으로 글러 먹었어.” 이것이 상담의 내용이다. 이 과정을 거쳐 자진 퇴사를 한 청년은 고용보험의 적용조차 받지 못한다. 기업의 입장에서 ‘적자 요소’를 아주 완벽하게 소거하는 것이다.

일본의 청년노동 비영리조직(NPO) ‘POSSE’는 2006년 창립한 이래 1천 5백건 이상 축적한 노동상담과 조사활동의 결과를 토대로 블랙기업들을 고발하면서 일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들은 매년 블랙기업 시상식(Black Corp. Award)을 열어 기업들에게 큰 '영예'를 안겨주고 있다.

인터넷 용어에서 발생한 ‘블랙기업’이란 개념은 어떻게 규정해야 할까. 일본의 청년들은 블랙기업을 “법령에 어긋나는 조건의 비합리적인 노동을 젊은 직원에게 의도적·자의적으로 강요하는 기업, 즉 노동착취가 일상적·조직적으로 이뤄지는 기업”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블랙기업을 유형화하는 패턴으로 월수입을 과장하는 꼼수, ‘정규직 채용’이라는 위장, 입사 후에도 ‘선별’이라는 이름으로 계속되는 취업 활동, 전략적인 직장 내 괴롭힘으로 자진 퇴직 유도, 잔업 수당 미지급, 비정상적인 장시간 노동 등을 열거하고 있다.

일본 청년들이 직장 생활을 하며 겪고 있는 문제를 전해 들으며 필자는 기시감을 느꼈다.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1990년대부터 일본 사회에 몰아친 장기불황과 청년실업의 심화, 비정규직의 확대는 청년들로 하여금 줄어드는 양질의 일자리를 향한 무한경쟁을 전면적으로 수용하게 만들었다. 한국사회도 1997년 외환위기 이후 2000년대를 관통하며 같은 과정을 밟아왔다. 일본이 앞서서 경험했고, 그 양상이 조금 더 적나라하고 극단적으로 나타날 뿐이다.

최근 한국에서도 절망적 결론의 징후들이 등장하고 있다. 17개월이나 수습사원 기간을 견뎌온 청년에게 정규직 전환 과정에서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다. 비정규직 사원의 ‘생사여탈권’을 가진 상사는 정규직 여부를 결정하는 면담으로 술자리를 요구했고 성추행을 가했다. 많은 청년들에게 위로가 되었다는 베스트셀러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출판한 기업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정규직 전환이라는 희망고문의 끝에는 계약 만료가 있었을 뿐이다. 일상적인 초과근무와 휴일근무, 기업대표들로부터의 성추행까지 견디게 했던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진 순간, 20대 계약직 노동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애초에 정규직 전환을 계획한 바도 없었던 회사는 ‘임시직 활용 방안’이라는 이름으로 2개월, 3개월, 6개월짜리 ‘쪼개기 계약’을 강요해왔다.

“노력하면 다 될 거라 생각해 최선을 다했다. 아주 24개월 꽉 채워 쓰고 버려졌다” 고인의 유서에 담겨있는 절규다.

굴지의 통신 대기업 LG유플러스의 고객센터에서 악성 민원인을 상대해온 상담직원은 각종 상품을 판매하는 영업업무까지 요구받았다. 화가 난 고객을 일관되게 친절한 목소리로 응대하며 매번 진땀을 뺐을 그가 자사의 IPTV 구매를 권유하면서 겪었을 감정노동의 고욕을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있을까. 매일의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퇴근할 수 없었고 주말에도 강제로 출근해야 했다. 그렇게 강도 높은 장시간 노동과 직무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30세의 청년노동자는 ‘노동청에 알려 달라’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청년들이 스러져간다. 이 비통하게 젊은 죽음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묻고 있는가. 청년의 노동을 일회용품 취급하는 한국의 블랙기업들과 그들을 뒷받침하는 노동시장의 구조는 청년의 삶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비정규직을 사용할 수 있는 사유를 제한하지 않는 ‘편리한’ 환경에서 기업들은 계약직 채용을 계속 확대해 나갈 것이다. 고용불안정에 근거한 새로운 형태의 노동착취는 더욱 심해질 것이다.
청년 개인의 탓이 아니다. 노력의 가치를 믿으며 최선을 다해 살아온 청년들에게 모욕과 폭력만을 되돌려주는 사회의 잘못이다.

청년들의 노동조합 ‘청년유니온’은 11월 9일 한국판 블랙기업 운동을 시작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당사자들이 블랙기업을 직접 제보할 수 있는 온라인 사이트(blackcorp.kr)를 열었다. 며칠 사이에 제보가 쏟아지고 있다. 청년유니온은 청년노동의 구체적 경험과 사회조사에 근거하여 ‘한국형 블랙기업 평가지표’를 연구개발하고, 내년 상반기에는 블랙기업 시상식을 개최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노동시장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는 사회적 운동을 전개해 나갈 계획이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44년 전 스물 두 살 청년 전태일의 외침이다. “우리는 일회용품이 아닙니다. 청년의 삶을 파괴하는 블랙기업에 맞서겠습니다.” 44년 후 이 시대의 청년 전태일들이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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