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위에 뿌려진 비디오아트, 박현기의 예술 위에서 싹을 틔우다
한국 위에 뿌려진 비디오아트, 박현기의 예술 위에서 싹을 틔우다
  • 대학신문
  • 승인 2015.03.22 0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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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박현기 1942-2000 만다라’전
▲ 무제, 1980

비디오아트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수십개의 모니터에서 알 수 없는 화면이 반복되는 예술작품이 떠올랐다면 당신은 비디오아트를 백남준의 영역이라고만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다. 여기 당신을 그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줄 예술가가 있다. 박현기는 백남준의 비디오아트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한국에서 자생적으로 피어난 비디오아티스트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5월 25일까지 열리는 ‘박현기 1942-2000 만다라’는 비디오아티스트 박현기의 아카이브를 비롯한 작품들을 전시하며 그의 변화해온 작품 세계를 조명한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운데에 원형으로 아카이브가 있고 그 주위에 박현기의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아카이브는 공적인 서류뿐 아니라 예술가의 사적인 메모, 일기, 사진, 드로잉 등을 포괄해 예술가의 일대기를 완성하는 자료다. 이번 아카이브 전시에는 국립현대미술관이 박현기의 유족으로부터 기증받아 정리한 2만여점의 자료 중 연인에게 보낸 연애편지부터 작품구상 과정의 드로잉북, 메모를 포함한 1천여점이 전시돼 있어 그의 예술 인생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모니터만으로 작품 활동을 한 백남준과 달리 박현기는 물이나 돌과 같은 자연물과 모니터라는 기계 장치를 결합해 자연과의 유기적 관계를 강조하는 한국의 전통적 사고방식을 표현했다. 동시에 그는 서로 극단에 있는 자연과 기계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감을 표현했다. 79년 작 ‘물 기울기 퍼포먼스’에서 박현기는 커다란 모니터를 들고 있다. 모니터의 영상에는 기울어진 물의 수면이 보이고 기울어진 각도에 맞게 박현기는 모니터를 비스듬하게 든다. 이를 통해 그는 관객이 마치 모니터 안에 진짜 물이 들어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이듬해 제11회 파리 비엔날레에 출품된 ‘무제’는 돌의 영상을 담은 모니터가 실제 돌 사이에 끼워져 있다. 돌 사이에 있는 모니터 속 돌 영상은 관객에게 마치 영상 속 자연물이 실재하는 것 같은 환상을 심어주고 이를 통해 관객이 실제와 가상 사이의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 만다라, 1997

자연물, 모니터 그리고 퍼포먼스를 활용해 작업한 7-80년대와 달리 박현기는 90년대 들어서 비디오 프로젝터를 활용한 설치작업에 몰두했다. 97년 작 ‘만다라’ 시리즈가 그 대표적인 예다. 이 작품에는 비디오 프로젝터가 사용돼 모니터를 이용한 비디오아트와 형식적으로 다른 느낌을 준다. 박현기의 만다라 시리즈는 티벳 불교에서 우주의 진리를 뜻하는 만다라 형상을 차용한 작품이다. 원, 사각형의 기하학적인 도형들로 이뤄진 만다라가 형형색색 다양한 움직임을 반복하며 빠르게 전환된다. 자세히 보면 각 도형마다 포르노 동영상이 담겨 있는데 낮게 깔리는 신음소리가 작품 주변에서 흘러나와 관객들이 작품에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만다라 시리즈는 진리를 구성하는 것들이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세속적인 것임을 보여주며 성(聖)과 속(俗)의 모호한 경계를 표현한다.

99년 작 ‘현현顯現’은 대리석을 도화지로 삼아 영상이라는 물감을 칠해 완성되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는 바닥에 놓인 대리석에 시냇물이 잔잔하게 흐르는 영상이 프로젝터를 통해 펼쳐진다. 박현기는 자연과 현대기술의 관계를 표현하려 했는데 이는 프로젝터에서 나온 영상이 바닥에 놓인 대리석과 함께 완성되는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관객은 영상물에서 나오는 반복적으로 흐르는 물줄기 소리를 들으며 깊은 명상에 빠질 수 있다.

▲ 개인 코드, 2000

위암 투병 중 완성한 그의 유작 ‘개인 코드’에서는 죽는 순간까지 작품 속에 ‘세계는 양극단의 투쟁으로 이뤄진다’는 관점을 녹여내려고 노력한 박현기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은 프로젝터를 통해 지문 위에 사람들의 주민등록번호가 생겼다가 사라지는 영상을 보여준다. 여기엔 지문이나 주민등록번호가 인간 개체가 갖고 있는 고유한 코드이며, 고유한 유전자를 가진 인간은 세계 속에서 경쟁하며 살아간다는 그의 생각이 담겨있다.

비디오아트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시절부터 시작한 박현기만의 예술은 한국에서 터를 잡았고 후배들에 의해 계승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자연과 기계, 동양과 서양, 움직이는 것과 정적인 것들을 대비시키며 세계의 끊임없는 투쟁을 말하는 박현기, 그의 예술세계는 시간의 흐름을 이겨내고 오늘도 모니터 위에서 빛나고 있다.

사진제공: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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