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사람들 간 직접적인 접촉 없이도 SNS 등을 통해 감정이 전이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미국 국립과학원회보에 발표된 적이 있다. 이 이른바 ‘감정 전염’ 연구 실험은 약 68만여명의 페이스북 사용자들을 대상으로 각각 긍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감정을 담은 포스트를 노출 빈도를 통제해 공개한 뒤, 이들이 올리는 포스트에 담긴 감정을 분석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실험 결과는 포스트에 담긴 타인의 감정이 그것을 접한 이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는 통계적인 사실을 입증해주었다. 

이 실험 결과가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던 것은 그것이 기술하고 있는 이른바 ‘감정 전염’ 현상을 우리가 이미 익히, 아니 보다 극적으로 체험한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일 년 전쯤 남해상에서 일어난 한 여객선의 침몰 사건이 온갖 종류의 미디어를 통해 전달되자 여기에 다시 SNS, 포탈사이트 댓글 등을 통한 2차적인 반응들이 쉼 없이 재생산됐다. 슬픔과 분노의 표출, 애도와 비난 사이를 오가는 변화무쌍한 감정의 굴곡을 거치는 가운데 많은 이들이 우울감과 무기력을 호소했고, 심지어 어떤 전문가들은 국민적 트라우마가 우려된다는 분석을 제출하기도 했다. 

▲ 삽화: 이철행 기자 will502@snu.kr

우리는 애도한다고 말했다. 그들의 슬픔이 뼈아프게 느껴진다고, 그리고 아픔을 함께 나누자고도 말했다. 그러나 이 모든 말들이 수사(修辭)의 임계를 넘어 실천적 차원의 애도와 공감에 성공했는지는 의문이다. 우리는 결코 충분히 슬퍼하거나 아파하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면 아직 쌀쌀하고 황량한 광화문 광장의 그들이 그렇게 목 놓아 울고 있을 리 없다. 그럼 지난 시간 동안 우리가 내보인 일련의 반응들은 집단적인 감정 전염에 불과한 것일까. 감정을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처럼 취급하는 표현이 너무 과격하게 들려 불편한가. 하지만 당시의 우리가 정말로 미디어에 의해 송출된 거대한 배의 침몰 장면을 스펙터클로 소비한 것이 아니라면, 그게 아니라면, 일 년이 지난 지금 SNS와 포털사이트 댓글에 희생자와 유가족을 향한 폭력적인 언사가 난무하는 현실, 보수 단체들이 걸어 놓은 비난조의 현수막이 광화문 광장 맞은편에서 펄럭이고 있는 이 엄연한 현실은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물론 완전한 공감, 즉 타인의 감정을 나의 것으로 동일시하는 일은 실로 불가능한 윤리적 이상인지도 모른다. 아담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에 따르면, 주체는 항상 타자 바깥에 위치하는 까닭에 타자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감정에 대해서는 언제나 예외 없이 관망자적 입장에 놓인다. 침몰선에 갇혔던 것은 우리가 아니므로. 차가운 바닷물 속에 사랑하는 자식 또는 형제, 친구, 은사, 정다운 이웃을 잃은 당사자는 우리가 아니므로. 거기서 빚어지는 슬픔의 감정은 그것을 오롯하게 겪은 그들에게만 허락되는 몫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불가능한 동일시”의 시도들은 분명 존재한다. 자크 랑시에르는 1961년 10월, 프랑스 국민의 이름으로 프랑스 경찰에게 맞아 죽고 센 강으로 던져진 알제리인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려 했던 자기 세대의 분투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실상 그는 그들 자신을 알제리인들과 동일시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알제리인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이름인 ‘프랑스 국민’과 그들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것을 문제 삼을 수는 있었다. 알제리인과 ‘프랑스 국민’ 사이의 이 틈새에서 이루어졌던 “불가능한 동일시”는 희생자와 관망자, 또는 그들의 희생을 방관한 우리들 사이 그 어디쯤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을까. 

어느새 해가 바뀌어 다시 4월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정부의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 철회와 선체 인양을 촉구하며 416시간 투쟁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그들의 슬픔을 그들 몫으로만 남겨두지 않았으면 한다.

배하은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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