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에 도돌이표를
그 여름에 도돌이표를
  • 대학신문
  • 승인 2015.04.12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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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에게선 마른 꿀과 꽃향기가 났다. 누군가가 그 女人에 대해 설명해보라 하면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태초에 내가 맡은 냄새는 화학약품과 수류탄 냄새였다. 쾅쾅 울려 펴지는 폭음과 수류탄 냄새와 흙먼지가 섞인 급박한 피난의 현장에서 나는 태어났다. 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찢고 밖으로 나왔을 때 내 울음소리와 함께 한 여인의 흐느낌 또한 울려퍼졌다. 나는 그러한 태초의 장면들을 생생히 기억한다.

날 세상에 내보낸 어머니는 내가 첫 울음을 터트리자마자 나를 떠나갔다. 어쩌면 당신 손으로 탯줄을 끊으면서 그와 동시에 나와의 영원한 분리를 조용히 선언했는지도 모른다. 흙바닥에 나뒹굴던 나를 들어 올린 것은 한 아주머니의 두꺼우면서도 부드러운 손이었다. 어머! 아주머니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나를 자기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그 빨간 것이 갓난아이인 걸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언젠가 아주머니는 내게 그렇게 말했었다.

아주머니는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아주머니는 그 난리통에 날 끌어안고 남으로, 남으로 피난을 갔다. 아주머니는 홀몸이었다. 성장한 후에도 난 아주머니께 가족사에 대해 물은 적이 없고 그건 아주머니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주머니는 나를 깊숙한 산골짜기에서 키웠다. 깊숙한 산골짜기이긴 했지만 그 곳에도 삶이 있고, 아이들이 있었다. 코흘리개들과 함께 잠자리를 잡아 날개를 떼고 나뭇가지를 타고 올라가 매미를 잡고 투명한 계곡물에서 멱을 감으며 나는 소년이 되었다. 그 세월 사이에 수많은 꽃이 피고지기를 반복했음을 난 기억한다.

돌고 돌아 또다시 돌아온 여름, 매미를 백스물한 번째로 잡았던 날이었나, 나는 문득 내가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모든 것이 소년 시절에서 멈춰버린 것 같은 느낌. 나는 더 이상 청년도, 아저씨도, 할아버지도 될 수 없었다. 그런 느낌은 항상 가슴 속에서 몽글몽글 피어나며 나를 괴롭혔다. 넌 왜 수염이 안 나? 과거의 코흘리개 중 한 명이 내게 물었다. 난 대꾸하지 않고 잠자리 날개를 우둑, 뜯었다. 녀석은 어깨가 떡 벌어졌다. 난 가녀린 내 어깨를 슬쩍, 만져보았다.

여름이 두 번 더 지나면, 우리도 이제 산 밖으로 나가 살자꾸나. 아주머니가 그 말을 할 때 나는 청설모를 잡으러 쪼르르 달려 나가고 있었다. 네, 그래요! 오솔길을 달리며 온 산기슭이 다 울릴 정도로 맑은 목소리로 나는 소리쳤더랬다. 그리고 그 청설모를 따라 무작정 달려가다 마주한 계곡에서, 그 소녀를 보게 되었다.

소녀는 맑은 계곡물에 두 손을 담그고 있었다. 물장구를 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만 청설모를 놓쳐버렸다. 재빠르게 잔가지 사이로 달아나는 청설모의 뒤꽁무니를 보고 있는데 물장난을 하던 소녀가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처, 청설모 봤어? 내가 그 소녀에게 처음으로 한 말은 바로 그것이었다. 소녀는 빙긋 웃기만 했다. 난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소녀에게로 다가갔다. 소녀에게선 마른 꿀과 꽃향기가 났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면 다른 향기가 날 것도 같았지만 걸음을 멈추었다.

“청설모를 쫓고 있던 중이야?”

소녀가 물었다. 난 멍청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는 배시시 웃었다. 그 웃음 사이사이로 맑은 계곡물이 흐르고 바람이 불고 새들이 지저귀었다.

“청설모는 모르겠고, 난 항상 여기에 있어.”

그 말에 내가 무어라 대꾸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러나 그날 소녀와 함께 나뭇잎배를 만들고, 계곡물에 동동 띄워 함께 물에 손을 담그고 손장구를 쳤던 것은 생생하다. 소녀는 손장구를 치다 말고 하늘을 바라보며 아하-했다 나도 아하-했다. 아하하하- 해바라기처럼 벌어진 소녀의 입에 새파란 하늘이 와 담겼다. 소녀는 그렇게 환하게 웃었다. 그날 이후로 난 남들은 모르는 비밀을 가진 몽글몽글한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소녀의 이름은 ‘순이’였다. 난 가끔씩 아무런 이름자가 적히지 않은 파아란 하늘에 대고 순이, 라는 이름을 적어 보았다. 다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나는 당최 자라는 것 같지가 않았다. 불안했지만 난 소녀의 작은 손을 잡고 온 산을 굽이굽이 쏘다녔다. 여름이 두어 번 지나갔지만 아주머니 말 대로 이곳을 떠나고 싶진 않았다. 아직은 여길 떠나고 싶지 않아요. 소녀를 떠올리며 내가 이야기했고, 아주머니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는 아직 나보다 키가 작았다.

소년시절에서 나의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은 커다란 보따리를 들고 다니는 행상에 의해 느낌이 아닌 기정사실로 바뀌어 나갔다. 엄청나게 큰 보따리를 등에다 짊어지고 다니는 애꾸눈이 행상이 한 명 있었다. 어느새 수염이 나고 목소리가 걸걸해지기 시작한 과거의 코흘리개들은 애꾸눈이에 대해 온갖 소문을 만들어내었다. 그들은 애꾸눈이의 보따리가 과연 무슨 색인가에 대해 논쟁했다. 육안으로 보기에 그 보따리는 갈색이었다. 옆집 칠구는 어느 날 밤 수박씨를 퉤 뱉으면서 말했다. 그거 사실 하얀색 보따린데 사람 시체를 넣어 다녀서 피 때문에 갈색으로 보이는 거야. 피가 마르면 갈색이 되거든. 난 내 팔에 붙은 수박씨를 손가락으로 튕겨내었다. 친구들은 애꾸눈이에 대해 떠들다가도 애꾸눈이가 그 갈색 보따리를 들고 다가오면 일제히 숨을 죽였다. 세상은 그런 법이었다.

그 날도 애꾸눈이 이야기로 열을 올리고 있을 때였다. 달수가 칠구의 말을 끊고 막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찰나 애꾸눈이가 이쪽으로 걸어오더니 우뚝 서서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아이들이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바깥까지 들려왔다. 너, 늙지 않겠구나. 애꾸눈이는 더 다가오려 하는 듯 한쪽 발을 들더니 무슨 바람이었는지 다시 발걸음을 돌려 천천히 멀어져 갔다. 달수는 쩍 벌어진 입을 쉽게 다물지 못한다. 저, 저 애꾸 뭐래? 미친 거 아니야? 칠구가 굵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말 그대로 그것은 중얼거림일 뿐이었다.

그 뒤로 나는 애꾸가 한 말을 이부자리에 누워 꼭 한 번씩은 생각했다. 그 말을 생각하면 가끔은 무섭고 가끔은 두렵고 가끔은 화가 솟구쳤다. 애꾸가 나를 그저 어린아이 취급한 거야. 그렇게 되뇌며 베개에 머리카락을 파묻었다. 난 소녀를 만나고 싶었다. 소녀를 만나면 나는 마치 어른이 되어가는 듯한 기분 좋은 착각에 휩싸이곤 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 난 늙고 싶지 않아.” 어느 날 소녀는 내 손을 잡고 천진하게 웃으며 말했다. 난 그 말에 반기를 들고 싶었다. 난 이미 시간이 멈춰 버렸다고, 그건 생각보다 훨씬 끔찍한 것이라고. 그러나 이 작은 소녀에게 그렇게 끔찍한 것을 알리고 싶진 않았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소녀는 이미 나보다 키가 커버렸으며, 시간이 갈수록 소녀는 소녀가 아닌 여인이 되어갔음을. 또한 나는 소년이 아닌 청년이 될 수 없음을. 나는 나의 아름다운 女人보다 키가 작았다. 마찬가지로 어느 날, 더 이상 아무도 매미를 잡지 않게 된 지도 까마득해질 즈음. 어느새 청년이 된 옆집 칠구가 은은한 세월의 향내를 풍기는 노송 아래서 그녀를 껴안는 것을 보고 나는 도망치듯 집으로 뛰어왔다.

그 날 새벽 나는 최소한의 옷가지들만 챙겨 집을 나왔다. 나무대문을 소리 나지 않게 닫고, 길게 난 계곡을 따라 걸어가며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산 능성이 한 개를 넘었다. 너무나 괴로웠다. 아주머니부터 시작해 함께 애꾸눈이 이야기를 하던 친구들, 아름답고 새하얀 소녀까지 두둥실 떠올라 맴을 돌았다. 어깨가 떡 벌어진 칠구가 다시금 순이를 안는다. 산 능성이 두 개를 넘었다. 나는 칠구를 미워하나 소녀를 미워하나 혹은 영원히 소년일 나 자신을 미워하나. 산 능성이 세 개를 넘었다. 소녀에게선 마른 꿀과 꽃향기가 났다. 네가 좋아. 소녀는 얼굴을 붉혔더랬다. 산 능성이 네 개를 넘었다. 그래, 나 또한 소녀를 좋아했다. 산 능성이 다섯 개를 넘었다. 모든 것은 가벼이 아래로 가라앉고, 파란 하늘이 한없이 잇닿아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애꾸눈이의 말은 맞았다. 난 그 후로 이어진 나의 70년의 인생을 통해 그 말을 비극적이게도 증명해내었다. 거울 안엔 언제나 그 시절 그 소년이 들어있었다. 세상은 처음 보는 것 투성이었다. 난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계속 거처를 옮기며 소년 행세를 했다. 소녀들은 공원벤치에 앉아있는 내게 호의를 표했다. 그 옛날 내가 사랑했던 소녀를 닮은 그들은 날 좋아한다 말하였다. 겉으로 보기엔 너희 또래 같지만, 난 사실 팔십대 노인이란다. 내가 말하면 그들은 깔깔 자지러지게 웃을 뿐이었다. 나는 그럴수록 그들에게서 도망치고만 싶었다.

성장에 대한 트라우마는 평생을 내 곁에 자리했다. 수많은 것을 보고 듣고 수많은 책을 읽고 소년의 몸으로 수많은 사람을 만나며 내 정신은 어릴 때와는 달리 깊어져 갔다. 내 늙은 정신은 젊은 육체에 담겨 이리저리 팔도를 옮겨 다녔다. 내 젊은 육체는 힘이 넘쳐 언제까지고 삼일 밤을 새며 여행하고, 막노동을 하여 돈을 벌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풍경을 볼 수 있음을 끊임없이 알려왔다. 그러나 내 늙은 정신은 내가 정신없이 무언가를 사기 위해 시장에 뛰어갔다가도 내가 사려 했던 것이 무엇인지 전혀 기억하지 못할 때, 이미 종말을 고해버린 것이었다. 마침내 내 정신은 내 육체가 갈 수 있는 곳보다 더 먼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몇 십 분, 몇 시간으로 끝났던 비밀스런 여행은 갈수록 길어졌다. 그러던 어느 뜨거운 여름밤, 내 고매한 정신은 내게 돌아오지 않는 끝없는 여행을 선고했다.

아하- 여긴 또 어디일까. 무심히 산 안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처음으로 계곡이, 다음으로 노송이 눈에 들어온다. 아하- 다 그대로구나. 이 정겨운 흙 냄새, 계곡물 소리, 산새 울음소리. 아주머니의 움막은 없네. 수박을 나눠먹었던 오두막도 없고. 다 뿔뿔이 흩어졌구나. 애꾸눈이는. 아주머니는. 칠구는. 달수는. 그리고 순이는. 어디로 갔을까? 어떻게 되었을까? 옛 집터엔 예쁘장한 펜션들이 들어차 있다. 나는 순이의 나이를 가늠해 본다. 나와 비슷한 또래였으니 그 소녀는 이젠 할머니가 되었겠군, 그래.

그런 생각을 하며 막 돌아서려 하는데 무언가가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한 노파가 펜션 정원에 화사하게 핀 꽃에 할미꽃처럼 허리를 굽혀 물을 주고 있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 만면에 아하- 젊은 웃음소리가 피어나는 듯했다. 해바라기처럼 환히 미소하며 그녀는 꽃에 물을 주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부드러운 흙을 꾹꾹 밟았다. 난 그녀가 순이임을 확신했다. 그녀가 왜 그 때 아무런 말도 없이 떠나갔냐고 내게 채근한다면 난 잠자코 들어줄 것이다. 왜 너는 늙지 않고 여전히 소년의 모습이냐고 묻는다면 잠자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줄 것이다. 늙지 않은 것이 아니며 늙은 것도 아니다. 우린 모두 늙었고, 또한 우린 모두 젊었다.

발에 돌이 채이고 내려쬐는 뙤약볕에 땀으로 옷이 젖어 내 등에 쫙 달라붙었다. 그녀의 화사한 이미지는 웬일인지 자꾸만 가까워진다. 아! 세월의 흐름을 타고 곱게 늙어간 그 아이의 모습이 너무나 예뻐서, 나는 그 아이가 예전의 소년을 기억해주긴 할는지도 의심해보지 못한 채, 미친 듯이 나도 모르게 그 女人에게로 달려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김민정(인문계열·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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