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 대한민국을 바꿉니다.” 모 지상파 방송사의 2015년 캠페인 구호다. 생존과 성공을 위해 달려왔던 한국인의 모습을 반성하고, 이제는 우리사회의 질적 성장이 필요함을 언급하며, ‘관용과 배려, 공존’으로 ‘함께 살고 싶은 사회’를 만들자고 제안한다.

그 방송사에서 현재 방영중인 드라마「풍문으로 들었소」는 우리사회 꼭대기에서 부와 권력의 세습을 이루어가는 대한민국 최상류층의 위선과 속물의식을 날카롭게 풍자하는 블랙코미디다. 드라마의 주인공인 대형 로펌 대표 한정호(유준상 분)는 “요즘 세상에 귀족이 어딨습니까, 다 시민이죠”라며 타인에 대한 “존중, 이해, 관용, 아량” 등을 강조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생학적 관점에서 서민층인 사돈 집안을 경멸하고 경쟁에서 낙오한 인간들을 무시하며 대중의 우매함을 비웃는다. 그의 배려는, 마키아벨리의 군주처럼 자신의 속내를 철저히 숨긴 상태에서, 법적인 하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가문의 명예와 권력과 부를 유지하는 데 지장이 없는 한 어디서든 누구에게든 발휘될 수 있는 것이다.

▲ 삽화: 이철행 기자 will502@snu.kr

한편, 그의 집안과 회사의 ‘가신들’, 즉 비서, 수행원, 집사들은 주인공 내외의 일상과 업무를 관장하며, 더 나아가 이들의 행동범위를 설정하기도 한다. ‘을’로서 역할 하는 그들이 없다면, ‘갑’ 내외는 사무를 처리할 수도, 외출을 할 수도, 감정을 제어할 수도 없을 듯 보인다. 마치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드라마로 옮겨놓은 듯하다. 헤겔이『정신현상학』에서 제시한 바에 따르면, ‘주인’은 본성상 ‘노예’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사물과 관계하며, 이 사물을 단지 ‘향유’할 뿐이다. 반면 노예는 ‘노동’을 통해 이 사물이 대상으로서 갖는 자립성을 체험하는 가운데 사물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하면서 그 스스로가 자립적 의식을 갖게 된다. 결국 삶의 과정에서 주인은 자기의 존재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노예라는 타자에 의존해 비자립적 의식을 갖게 되면서, 주인과 노예의 의식 상태는 역전된다. ‘주인’과 ‘노예’를 시류에 맞추어 ‘갑’과 ‘을’로 바꾸어 이해해도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 물론 헤겔의 분석이 옳은지 그른지는 둘째 치고 말이다.

아무튼 이렇게 ‘고차원’의 의식을 보유한 ‘을’들은 그들 간의 연대를 통해 다른 상류층의 ‘갑질’을 응징하기도 하며, 또 다른 ‘을’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기도 한다. 엉겁결에 이 집안의 며느리가 돼 버린 서민 출신 ‘작은 사모님’은 이들의 도움으로 난관을 헤쳐 나간다. 이런 훈훈한 장면을 보고 있자니, 영화「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떠오른다. 영화의 주인공 구스타브가 ‘주인’으로 인해 곤경에 처했을 때, 그를 구해준 것은 동료 호텔지배인들의 연대 조직인 ‘십자열쇠협회’였다. 그들의 도움으로 궁지에서 벗어난 그는 많은 재산을 모은 후, 이를 그와 동고동락한 로비 보이 ‘제로’에게 물려주고 세상을 떠난다. 중동 출신의 전쟁고아 ‘제로’는 아버지와 다름없던 구스타브의 추억이 가득한 낡은 호텔을 지키며 여생을 보낸다.

‘갑’의 연대가 핏줄, 물질의 연대라면, ‘을’의 연대는 휴머니즘, 가치의 연대이지 않을까. 한정호의 배려가 이해관계의 타산 속에서 나온 것이라면, 구스타브와 동료들의 배려는 동등한 인간에 대한 우애와 환대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이 세상의 모든 ‘을’이 자립적 존재로서의 ‘주인’이 돼 서로를 배려, 존중, 관용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기를 꿈꿔본다. 헤겔의 통찰이 틀리지 않았음을, 그리하여 아직 ‘역사의 종언’을 말할 수 없음을 기원하며.

장준영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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