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삽화: 이철행 기자 will502@snu.kr

한 계절 전 파리에서 일어났던 테러 사건이 대서양 건너 북미 대륙의 공론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논쟁을 가열시킨 원인은 국제 펜클럽 미국 지부인 펜 아메리칸 센터가 테러의 희생양이 된 프랑스 만평주간지 샤를리 엡도에 ‘표현의 자유상’을 수여하기로 결정한 데 있었다. 이러한 결정에 대해 주노 디아스, 마이클 커닝햄과 같은 여러 저명한 작가들이 반대 입장을 표명하며 항의 서한에 서명했고, 폴 오스터와 아트 슈피겔만을 위시한 또 다른 일군의 작가들은 펜 아메리칸 센터의 결정을 지지한다고 밝혀 양측 작가들 사이에 팽팽한 대립 구도가 형성됐다. 덕분에 언론의 자유는 무엇이고, 표현의 자유가 허용되는 범위는 어떠해야 하는가와 같은 고전적 논제가 때 아닌 주목을 받고 있다.

‘표현의 자유상’(Free Expression Courage Award)이라는 명칭이 시사하듯 통상적으로 펜을 든 이들이 행사하는 자유란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자유로서의 ‘프리덤’(freedom)이다. 조나단 스위프트나 볼테르, 알렉산더 포프로 대표되는 위대한 풍자 문학의 전통이 서양 사회에 뿌리 내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불간섭으로서의 표현의 자유를 폭 넓게 보장하려는 사회적 분위기와 토양에 힘입은 바가 크다. 여기서 오랜 역사와 전통으로 이미 충분히 입증돼 온 표현의 프리덤과 그것이 지닌 미덕에 의문을 품는 무모한 시도를 감행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샤를리 엡도 사건을 하나의 징후로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또 다른 표현의 자유를 사유하고 실천해야할 시대적인 요청이 지금 우리 앞에 놓여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를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자유를 지시하는 또 다른 단어로 ‘리버티’(liberty)가 있다. 프리덤이 내 마음대로 행동한다는 사적인 의미의 자유에 가깝다면, 리버티는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지며 책임이 수반되어야 하는 시민적 자유의 의미를 함축한다. 샤를리 엡도를 둘러싼 시대적, 사회적 맥락을 고려해보건대 그들의 지면이 마땅히 정초했어야 할 표현의 자유는 후자에 가까운 것이 아니었을까. 해당 사건의 테러범들은 저소득층 이민자가 주로 거주하는 파리 제19구 출신으로 각각 알제리계와 세네갈 출신 이민자 2세라는 배경을 지니고 있었다. 오늘날 프랑스 사회의 상당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무슬림 이민자 계층은 이 테러범들과 유사한 배경을 공유하는 한편, 해결되지 않는 경제적 빈곤과 사회적 차별에 그대로 노출돼 있다. 이 중 어떤 이들에게는 샤를리 엡도가 누린 수사(修辭)의 무한한 자유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치명적인 공격, 또는 사회적 박탈감을 심화시키는 가중형벌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상황이 이러하다면 프랑스 언론은 마땅히 이민자 계층을 포함하는 모든 사회구성원들의 리버티를 위해 거위 깃펜을 드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복수(複數)의 자유를 앞에 두고 어느 쪽이 보다 윤리적인지를 고민하는 것은 프랑스쯤 되는 이른바 언론자유 선진국에서나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지난달 발표된 ‘2015 언론자유 보고서’에서 한국은 전체 199개 국가 중 아프리카 나미비아와 공동 67위에 오르며 ‘부분적 언론 자유국’으로 분류됐다. 얼마 전 고용노동부가 고용유연화 관련 정책 홍보를 위해 모 경제지에 돈을 주고 정책 홍보성 기사를 게재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됐다는 점을 상기해볼 때 예상 밖의 순위는 아니다.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가장 기본적인 표현의 자유조차 수호하지 못하는 대한민국 언론에게, 그럼에도 어떤 자유를 위해 쓸 것인가와 같이 한 차원을 넘어선 물음을 끊임없이 던져야 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로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표현의 자유인 까닭이다.

 

 

배하은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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