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요리하는 TV, ‘쿡방’

 

요즘 예능 방송에서는 큰 키의 젊은 셰프가 팔을 번쩍 들고 후추를 ‘허세 돋게’ 흩뿌리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좁은 주방에서 요리를 선보이는 요식업 전문가는 특유의 구수한 진행으로 ‘마성의 백주부’라 불린다. 이들의 레시피는 인터넷 인기 검색어에 오르고, 블로그나 SNS에는 시청자들의 레시피 체험기로 넘쳐난다. 쉽게 따라할 수 있는 레시피를 재밌게 전달하는 요리 예능 ‘쿡방’(쿠킹+방송)이 대세가 된 것이다.

요리가 예능으로 뜨기까지

1980년대부터 등장한 TV 요리 프로그램은 요리 정보를 정형화된 방식에 맞춰 순서대로 전해주는 데 치중했다. 최초의 요리 프로그램 EBS <오늘의 요리>가 등장한 이후 여러 요리 프로그램에서 입담 좋은 여성 요리 연구가들이 주부들을 대상으로 정확한 요리비법을 전수했다. 진종훈 문화평론가는 “이 시기 요리 방송은 전문가를 쫓아서 요리를 배우는 학원 강좌와 비슷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다 2000년대 지상파에서 촬영차가 몇 대씩 동원되는 ‘리얼 버라이어티’가 인기 몰이를 하자 요리만을 방송 소재로 내세워 성공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요리는 예능에 빠질 수 없는 박진감이나 긴장감을 주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김헌식 문화평론가는 “지상파 예능에서 규모가 작은 요리만을 전면적으로 내세우기에는 실패에 대한 부담이 컸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본격적인 쿡방은 예능의 새로운 형태를 실험할 수 있는 케이블과 종편 채널에서 시작됐다. 스튜디오 안에서 적은 비용으로 만들 수 있어서 요리는 케이블과 종편 채널에게 단순한 토크쇼만큼이나 좋은 소재가 됐다. 이들은 차별화된 요리 예능으로 케이블임에도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지난해부터 올리브 TV에서는 스타 셰프들을 발굴했다는 평을 받는 <올리브쇼>에 이어 신동엽과 성시경이 셰프를 모셔와 요리를 배우는 <오늘 뭐 먹지?>로 인기를 끌고 있고, 가장 최근 등장한 JTBC <냉장고를 부탁해>는 스타 셰프들이 게스트의 냉장고 안 재료만으로 완성도 높은 요리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보여줘 쿡방 트랜드에 불을 지폈다.

쿡방의 유행은 이제 지상파로도 번지고 있다. 개인방송으로 경쟁을 벌이는 MBC <마이리틀텔레비전>에서는 쿡방 열기에 힘입어 요식업 전문가 백종원이 여자 아이돌과 개그맨을 제치고 뜻밖의 우승을 차지했다. <진짜 사나이>와 <정글의 법칙>에서는 셰프들이 고정 출연해 주방이 아닌 군대와 정글에서 요리를 하는 색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쉬우면서도 그럴듯하게

쿡방이 떠오른 배경에는 집에서 간단히 요리를 해먹고 싶어 하는 대중의 욕구가 자리하고 있다. 1인 가구와 맞벌이 가정이 크게 늘면서 사람들이 요리를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어졌다. 독일의 시장조사업체 GfK에 따르면 15세 이상 한국인이 요리하는 시간은 일주일에 3.7시간으로 22개국 중 가장 짧았다. 요리할 시간이 부족해 외식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인구가 늘면서 집밥에 대한 향수는 더 커졌다.

간편하게 즐길 수 있는 요리 문화에 대한 욕구는 그동안 인터넷 블로그나 SNS를 통해 표현되고 해소됐다. 3년 전부터 요리 블로그를 운영해온 이현우 씨(42)는 “어려운 요리를 올려놓으면 맛있어 보이긴 한데 차라리 사먹겠다는 댓글이 달린다”며 “요즘은 보여주기보다 현실적으로 공감되거나 누구나 할 수 있는 요리를 해야 한다”고 방문자들의 취향을 꿰뚫었다. 예컨대 그는 캠핑장에서 저녁에 먹고 남은 육포를 아침에 일어나 소고기 대용으로 써서 끓이는 미역국, 라면 스프로 간을 한 뒤 옷걸이와 호일을 이용해 굽는 바베큐 등을 블로그에서 소개했다. 같은 맥락에서 혼자 살면서 손쉽게 만들 수 있는 ‘자취 요리’와, 재미로 뚝딱 만들 수 있는 ‘야식 요리’가 인터넷을 중심으로 하나의 식문화로 형성됐다. 게맛살로 바닷가재 맛 내기, 1000원으로 피자 만들기 등 싼 재료로 대충 만들어도 그럴 듯한 맛을 낼 수 있다는 ‘야매 요리’도 유행했다.

쿡방은 이미 인터넷 상에 형성됐던 이러한 욕구를 잘 포착해 방송화했기 때문에 유행할 수 있었다. <오늘 뭐 먹지?>는 요리 초짜 신동엽도 따라 할 수 있는 생활밀착형 레시피를 제시한다. <냉장고를 부탁해>에서 셰프들은 15분 만에 흔한 재료로 마술처럼 한 접시 요리를 탄생시킨다. 장근영 심리학 박사는 “과거 요리 프로그램은 요리가 이런 거구나 배우는 데 도움을 줄지는 몰라도 난 못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면 쿡방은 스스로 할 수 있다는 효능감을 느끼게 한다”고 진단했다.

셰프들은 자취방에서 흔치 않은 오븐 대신 흔한 전자레인지와 후라이팬을 사용해 굽기, 볶기 등 쉽고 빠른 조리법만을 써서 자취인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냉장고를 부탁해>에 출연하는 웹툰 작가 김풍은 아예 자취요리전문가를 자칭한다. 올리브 TV를 내내 틀어놓고 산다는 자취생 손진 씨(에너지시스템공학부 박사과정·11)는 “쿡방을 보기 시작하면서 자취 요리의 한계에서 많이 벗어났다”며 “인스턴트의 비중이 줄고 다양한 재료를 활용하는 것에 두려움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이처럼 쿡방이 간편함과 저렴함을 내세우면서 SBS <잘 먹고 잘 사는 법> 등이 외치던 웰빙 요리는 설 자리를 완전히 잃었다. 김헌식 문화평론가는 “유기농 재료는 비싸고, 전통적인 방식은 복잡하다”며 “방송이 일상생활의 요리법을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백종원이 마요네즈를 듬뿍 섞은 명란젓, 초코와 치즈가 들어간 칼로리 폭탄 토스트 등 웰빙과 거리가 멀지만 흔한 초저가 재료로 요리를 만들어 시청자들로부터 인기를 얻은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요리에 예능 방송만의 묘미를 더하다 

쿡방은 인터넷의 쉽고 그럴 듯한 요리 정보를 넘어 TV 방송만이 줄 수 있는 묘미를 요리에 덧입히고 있다. 소개된 레시피들이 방송의 파급력에 힘입어 역으로 인터넷에서 확산된다. ‘자취음식 완전정복’ 페이스북 페이지를 운영하면서 쿡방의 레시피를 편집해 올리는 김형찬 씨(직장인·29)는 “마침 텔레비전에 소개된 음식이 3분 만에 간단히 할 수 있는 자취 요리라는 페이지의 콘셉트와 맞아 떨어졌다”고 말했다. 시청자 우연재 씨(성신여대 경영학과)는 “김치전 하나를 가지고도 셰프들이 마음대로 레시피를 만들고 시청자들이 또 다른 방식으로 만드는 과정이 재밌다”며 쿡방 레시피가 재생산되는 과정에서 얻는 재미를 이야기했다.

또 쿡방에서는 매력적인 인물들이 다양한 스토리를 풀어내기 때문에 여러 시청자를 아우를 수 있다. 특히 ‘셰프테이너’(셰프+엔터테이너)라고 불리는 남성 셰프들이 개성을 뽐내며 연예인처럼 활약하는 것도 쿡방의 성공 요인으로 꼽힌다. 때문에 요리에 관심이 없는 시청자도 예능으로서 쿡방을 즐길 수 있다. 평소 요리를 하지 않는다는 우연재 씨는 “프로페셔널한 셰프들이 맛을 보더니 멋쩍게 웃으며 물을 더 넣거나 허둥대다가 손을 베이는 등 실수하는 모습에서 친근감을 느낄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정수정 푸드 칼럼니스트는 “요리에 능숙한 기혼 여성들도 쿡방을 즐겨 보는데 이는 젊고 잘생긴 남자에게서 대접받는 대리만족을 느끼기 때문”이라 분석했다.

타인이 먹는 모습을 보여주는 먹방이 지고 만드는 행위를 조명하는 쿡방이 떠올랐다. 결과물만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 것이지만 시청자들이 요리에 대한 이미지 소비에 그칠지 실제 요리를 하게 될지는 미지수다. 다만 비싼 고급 레스토랑이나 머나먼 농어촌에서나 누릴 수 있는 듯 그려졌던 요리 문화가 현실의 소소한 재미가 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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