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만명의 베트남 파병 장병  2만여 명이 부상 입어

“아프지 않은 날이 없다” 약값, 생활비로 빚더미

1960년 2월, 김포공항이 개항하기 전까지 비행기는 여의도 광장에서 뜨고 내렸다. 1965년 ‘여의도비행장’에서는 베트남으로 파병된 맹호부대의 결단[]환송식이  열렸다.

1945년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베트남은 1954년 제네바 협정으로 잠정 분단된 후 중국[]소련 등의 지원을 받는 북베트남과 미국의 지원을 받는 남베트남이 10여 년간 내전을 벌였다. 그러나 호치민을 중심으로 한 독립 동맹이 우세하자 미국은 영국, 독일 등에 파병을 요청, 베트남 전쟁은 국제적 충돌로 번졌다. 박정희 대통령도 존슨 미 대통령의 파병 요청을 받아들여 세계 2번째 규모로 32만명을 파병했다. 

1973년 UN동맹군의 패배로 베트남전이 끝나고, 병사들이 제대했다. 5천여 명이 전사했고, 2만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신체마비, 피부이상 등 고엽제 후유증 문제 외에도 가정파탄, 정신착란 등이 상처로 남았다.

고엽제는 1962년부터 1971년까지 베트남 전역에 밀림을 제거하기 위해 뿌려진 맹독성 제초제다. 여기에는 맹독성 물질인 다이옥신이 다량 함유돼, 말초 및 중추신경계의 손상으로 인한 우울, 불안, 자살 등을 유발한다. 맹호부대 통신중대장으로 1년간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고엽제전우회 석정원 회장(73)은 오른팔이 완전히 마비됐고, 두 다리가 불편하다. 그는 “제대 후, 흘리지 않고 밥을 먹는 것이 어려워졌다”며 고엽제의 참상을 증언한다.

▲ © 김동인 기자

1992년 고엽제피해자전우회의 자료에 의하면 고엽제에 의한 후유증을 겪는 사람은 총 2천 341명으로 신체마비 227명,암환자 208명, 결핵 및 호흡계질환 134명, 피부병 264명, 손발부패 264명, 기형아 분만 106명, 정신질환 114명, 후유증 사망 108명, 비관 자살이 12명이다. 

베트남에서 사병으로 복무했던 현용현씨(59)는 전쟁이 끝난 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전시라고 착각한다. 그는 문고리와 자신을 밧줄로 묶고 매복 신호를 보낸다. 지붕 위에 올라가 이웃집에 돌을 던지며 수류탄 연습을 한다. 이웃 주민들은 현씨의 이상행동에 대한 조치를 취해줄 것을 구청에 진정한 상태다.

이훈진 교수(심리학과)는 “전쟁 등의 큰 충격을 겪으면 시간이 흐른 뒤에도 당시와 유사해 보이는 환경에서 반응을 보일 수 있다”며 피해망상, 광장 공포증 등 ‘외상후스트레스장애’에 대해 설명했다.

베트남참전전우회 박모씨(58)는 “병원에 가면 진단되는 병은 없지만, 베트남전 이후 몸 구석구석 아프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말한다. 항상 10종류 이상의 약을 먹으며, 몸이 아파 직장 생활도 불가능하다는 그는 “약값, 생활비로 진 빚보다 학비가 없어 아들을 대학에 보낼 수 없는 것이 슬프다”며 고개를 떨군다.

베트남 참전 병사는 65세 이상이 되면 월 6만원의 명예수당과 보훈병원 진료비 50% 감면 혜택을 받는다. 고엽제 후유증이 인정되면 월 23~215만원의 보상금과 국가유공자 등록이 가능하다. 후유증으로 의심되는 후유의증 환자는 월 23만2천원~46만3천원을 지원받는다. 그러나 휴유의증으로도 인정받지 못해 국비진료나 수당이 전혀 지원되지 않는 사람이 참전용사 생존자의 40%에 달한다.

베트남참전유공자전우회 배정 홍보실장은 “판정되지 않았으나 분명 존재하고 있는 베트남전의 후유증에 대한 보상의 폭을 넓혀야 할 것”이라고 당부하며 “전쟁의 상흔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아직도 너무나 많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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